이야기를 파는 점빵 46

이야기를 파는 점빵 46

아내와 둘이 지은 산속 흙집으로 이사하던 날, 경운기에 살림살이를 싣고
앞자리에 아들을 앉혔다. 덜컹거리는 산길을 한참 올라가는데, 내 옆에 앉은
아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경운기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감쌌다. 경운기 앞좌석에 앉아 그것도 차라고 졸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나는 슬며시 웃었다. 도시의 화려함은 커서 얼마든지 누릴 수 있지만, 자연 가운데서 유년을 보낸 경험은 지금 아니면 어찌 아이에게 심어줄 것인가 싶어 시작한 산골살이. 그렇게 초등학교 6년을 산길 오르내리며 자란 아이가 어느덧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삼십 년 세월은 그렇게
한 세대를 다시 이루었다.

“은유 보러 오세요”
영상 통화를 할 때마다 시부모 청하는 며느리가 고마워 가끔 간다. 할아버지
앞에서 재롱 부리는 손주 보다 손주 앞에서 재롱 떠는 내 모습이 더 즐거운 탓이다. 갓 씻긴 손주의 얼굴에 감도는 맑은 기운을 보면서, 서른 해 전에 경험한
우리 육아의 시절로 잠시 돌아가는 것도 유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재작년
내 생일 선물로 며느리는 임신 소식을 갖고 우리 집에 왔다. 기쁜 소식을 들은
아내는 아들 육아일기 쓴 공책을 보여 줬다. 며느리는 그 공책을 가지고 가서
틈 나는대로 읽는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가면 공책을 펼쳐 놓고 남편과
아들의 성장 비교를 하며 신기해 한다. 덕분에 잊고 있던 내 신혼의 달콤함을
꺼내 다시 곱씹어 보는 재미가 크다.

아들 며느리 오랜만에 늦잠 좀 자라고 손주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갔다. 둑길 양옆으로는 매화가 피어 향을 토했고, 아파트 숲 사이로 흐르는 대청천에는 파란 하늘이 내려앉아 도시의 삭막을 그나마 덜어주고 있었다. 예순을 넘긴 중늙은이가 미는 유모차를 먼 발치서 바라보며 눈인사 건네는 사람들 가슴에도 꽃이 피었을 거라 생각하며 커피집으로 들어갔다. 아들네 집에 가면 가끔
들르는 곳이다. 연하게 내린 커피를 느긋한 마음으로 마시는데, 커피집 이름도 easygoing이다.
남편은 원두를 볶고 아내는 커피를 내려주는 모습이 보기에 좋다. 갈 때마다
선물로 주는 드립백 커피 두세 봉지에 실린 향은 가슴에 오래 남는다. 자영업
이 어려운 시대라고 하지만, 꽃처럼 피어나는 작은 친절은 끝내 사람을
부른다는 것을 알 것 같은 커피집이다. 산책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침 7시부터 문을 여는 것도 차별화. 대청천 아침 산책길에 들리는 그 커피집이 오래 그곳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

‘이 얼마나 좋은 세상입니까
지금보다 소중한 순간은 없습니다
고민일랑 접어 두세요
그대 인생은 여전히 잉ing 현재 진행형이니까요’

커피집 벽에 붙은 글귀를 몇 번이나 곱씹으며 다시 유모차를 밀었다.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며 산에 나무를 심던 서른몇 살의 젊은 내가 곁에 졸졸 따라왔다. 콧잔등에 땀방울 송글송글 한 채 학교 마치고 산길 올라오던 여덟 살 아이의
붉다그레한 얼굴도 눈앞에 아른거렸다. 처음으로 아들의 앞니가 빠진 것을
기념해 공책에 적어놓았던 아내의 일기장도 생각났다. 그렇게 자연 가운데서 아이를 키우는 모든 순간은 가난과 불편을 넘어 우리에게 기쁨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 미래는 한 발 너머에 있는 꿈의 동산, 소중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유모차 안에 있는 손주에게 장난을 걸었다. 예순을 넘기며 다시 아이가 되어 간다 해도 결코 부끄럽지 않을 순간이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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