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사는 이야기/ 어머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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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네 사는 이야기>

 

‘어머니와 나’

오늘도 경포호수로
밤운동하러 가기 전에
혼자 저녁 드시는
적적한 어머니와
함께하려고 올라와
밥상을 차린다.
자식은 ‘부모의 혹’이라고…
나는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린 혹이고 실패한 인생의 죄인이다.

나에겐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1993년 가을 추석날이었던 것 같다. 당시 부산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던 나는 추석을 쇠러 강릉 고향집에 와 있었을 때의 일이다.

고향집 건너편 산으로 들어가는 골짜기에는 해방 전에 조성되었다는
 오래 된 공동묘지와 또 그 부근에는 천주교 묘원이 산 하나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추석날 아침이 되자 차례를 지낸 가족들이 산골짜기에 있는 산소로 성묘를 가기 위해 고향집 앞 대로변에 차를 대기 시작했다.

건너편 공동묘지와 천주교 묘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고향집 앞 대로변에 차를 대야 하기 때문에 추석이나 설날 등 명절에는 늘 집 앞 대로변이 복잡하기 이를데가 없다.

그 해 추석날도 다름없이 주차시키는 차와 빼는 차들로 복잡했는데, 그 때는 가을이라 어머니께서 고추를 대로에서 집 마당쪽으로 들어오는 진입로에다 펴서 말리고 계신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 어떤 검은 승용차가 차를 후진하고 돌다가 그만 우리집 진입로쪽으로 들어와 말리던 고추를 깔아뭉개 버린 것이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어머니께서는 득달같이 달려나가 운전하는 사람에게 뭐라 뭐라 항의를 하셨던 것 같다.

 시집 올 때는 얌전한 처녀였던 우리 어머니는 평생 월급봉투 한 번 가져다

준 적 없는 우리 아버님; 평생 크고 작은 선거만 다섯번 치루어서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할아버지께서 물려준 전답만 팔아치울 줄 밖에 모르는 당신 남편 덕분에, 감자알같이 당신의 손안에 줄줄이 매달린 3남 1녀 먹이고 가르치느라 세파에 시달려 괄괄한 성격이 되어 버리셨고, 따라서 항의 방법이 다소 과격하셨던 듯 차량 운전자와 시비가 벌어졌던 것 같다.

그 광경을 보고 내가 어머니쪽으로 다가갈 때 쯤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몇 마디 어머니와 설전을 주고 받던 그 남자가
나이 많은 사람과 오래 얘기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듯 서둘러 차를 빼면서
아마 뭐 촌에서 이따위 고추갖고 이러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렸던 것 같다.

그 말을 듣자 어머니가 그 도망가는 차의 꽁무니에 대고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야!!!  이래뵈도 우리집에 석사가 셋에 박사가 하나다” …….

서둘러 차를 빼 도망가던 그 남자의 어이없다는 듯 황당해 멈칫하던 그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어머니가 그 상황에서 왜 하필 그런 말을 내뱉었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짐작에 혹여 시골의 촌부로 보고 무시하는가 하는 노파심에 불쑥 터져 나온 어머니의 자존심의 표현이었으리라.
어머니도 젊어 한 때는 시의원, 도의원,
국회의원 사모님 소리를 들으시던 분이었다.
집으로 들어오면서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집에 박사는 없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느냐고…

어머니는 “곧 딸텐데 뭐 어때” 하시며 분을 삭이시듯 혼자말처럼 말씀하셨다.

평소에 늘 자식중에 간호사 한 명,  공무원 한 명, 회사원 한 명, 대학교수 한 명… 이렇게 되는게 소원이라고 말씀하셨던 우리 어머니는 간호사가 싫다는 누나도 간호사를 만들려고 4년제 일반대학에 간다는 누나를 억지로 3년제 간호대학에 보내셨다.

막내아들만 꼭 박사를 따서 대학교수가 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어머니의 이 바램 (- 물론 박사를 따더라도 꼭 교수가 된다는 보장도 없었지만 -)은 어머니 뜻과는 반대로 석사논문 쓰고 나서 공부에 환멸을 느끼고 취직해 버린, 고향과는 정반대 객지의 바람부는 남녘끝의 땅에서 억지로 회사를 다니고 있었던 막내아들의 가슴에 얹혀진 필생의 큰 바윗돌이었다.

그 후 그 막내아들은 남들 다 부러워하는 전도유망한 공기업 사무직을 2년도 채 안돼 때려 치우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 9년만에 다시 신림9동 고시촌에 파묻히는 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막내아들은 박사과정을 마치지도 못했고, 어머니의 소원이던 대학교수가 되어 어머니 소원의 마지막 화려한 화룡점정을 찍어 드리지 못했다.

또한, 어머니 늙그막에 가정적으로도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올해 여든일곱… 구순이 다 되어가는 늙은 어머니와 단촐한 저녁밥상을 차려 마주하니 그 오래된 묵직한 바윗돌이 여전히 가슴을 꽉 누르고 있다.

    -강릉 칸티우스-

                                                  – 2015.  11.  1 –

좋은글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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