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너미의 고욤나무
동네 앞산줄기가 말 잔등이처럼 축 처진 자리를 바래너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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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 보면 평평한 억새밭인데, 그 중간쯤 늙은 고욤나무가 한 구루 서 있다. 고욤나무 아래는 평퍼짐한 너럭바위가 엎드려있고 그 옆에 가랑잎이 가득 가라앉은 옹달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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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 자리가 집터였다고 하는데 집이 있었던 것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집터가 아니랄 수도 없다. 고욤나무는 원래 울안이나 집 근처에 서 있는 과수다. 한때 이 산정에도 산바람같이 초연한 삶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고욤나무가 주장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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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올 때면 가끔 그 늙은 고욤나무가 생각난다. 윗버들미 사람들은 가을 일이 끝나면 다람쥐 도토리 물어 나르듯 부지런히 나무를 해 날랐다. 섣달 그믐까지 집 안에 나뭇짐이 가득 쌓여야 정월 한 달 맘 놓고 놀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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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들은 바래너미로 나무를 하러 다녔다. 나무를 해서 지고 예닐곱 번은 쉬어야 돌아올 수 있는 먼 나무 길이지만 거기 가야 관솔 박인 소나무 삭정이나, 마른 싸리나무 같은 불 때기에 편하고 화력좋은 나무를 해올 수 있었다. 그 나무는 동매 떠서 사람들 눈에 잘 띄는 삽짝 안에 자랑하듯 배겨 놓았다. 그걸 동네 사람들은 정월 나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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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로 섣달 그믐께 가래떡쌀도 찌고, 조청도 고고, 두부도 하고, 적도 부쳤다. 정월 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적의(適宜) 화력을 생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화력은 분주한 정월달 부엌간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삼동의 부엌간에서 연기가 나지 않는 높은 화력을 만들어 쓸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여인네들의 복이다. 그 복을 남정네들이 바래너미에서 가져다주었다. 정월 나무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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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래너미 나무를 때는 집은 굴뚝을 보면 안다. 파란 연기가 조용히 오르면 바래너미 나무를 때는 것이고, 굴뚝에서 짚똥같이 검은 연기가 오르면 청솔가지나 물거리(생나무)를 때는 것인데, 굴뚝의 연기가 그 지경으로 나와 가지고는 내외간의 금실 좋기는 꿩새 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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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굴뚝에 그 지경으로 연기를 피워 올리려면 아내가 아궁이에 얼굴을 들이대고 ” 빌어먹을 놈의 화상ㅡ,빌어먹을 놈의 화상ㅡ,”하고 사방욕을 하며 모깃불 피울 때처럼 눈물콧물 좀 흘리며 불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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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월나무가 삽짝 안에 그득하면, 집이야 비록 오두막일망정 벼백이나 하는 고대광실(高臺廣室)못지않게 복돼 보였다……(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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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하늘아래 펼쳐진 산등성이의 마른 억새밭이 전혀 적적하지 않았다. 억새밭 가운데 고욤이 잔뜩 열고 서 있는 늙은 고욤나무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고욤나무는 바람센 산등성이의 살기 힘든 여건 때문인지 훤칠하지는 못해도 많은 가지에 고욤을 잔뜩 열고 있었다. 흡사 삶이 고단하다 불만할 줄도 모르고, 부자 되려고 아등바등 욕심 부릴 줄도 모르고, 그저 그 날이 그 날같이 부지런할 줄 밖에 모르는, 애들 많은 우리동네 이 서방 박 서방 중 한 사람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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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맥은 이마 위에 떠 있고, 그의 지맥인 높고 낮은 산등성이들은 눈 높이거나 눈 아래 놓여 있었다. 내가 앉은 바래너미 산등성이는 낮아지면서 남쪽으로 뻗어 갔는데 끝은 안 보이고 그 앞쪽을 가로막고 소백산맥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래너미 산등성이에서 가지를 친 작은 산등성이들이 버들미 골짜기를 향해 서쪽으로 뻗어 내리다 도랑 앞에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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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산줄기는 물길을 가로막지 않고, 산줄기를 피해서 흘러가고 있었다. 처녀 같은 골짜기에 초가집과 다랑논과 뙈기밭들과 무덤들이 다소곳이 안겨서 소르르 겨울잠에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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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고만고만한 구획의 작은 경작지들이 차지한 다툼 없음이 산등성이와 골짜기의 순리와 잘 어울렸다.
“나도 저 모습같이 살리라.” 울컥 그런 감정이 복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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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고욤은 털어서 단지에 담아 두었다가 눈이 깊이 앃인 겨울밤에 사발로 떠다가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이다. 자디잔 열매에서 껍질과 씨를 빼면 과육은 얼마 안된다. 단지 안에서 죽같이 엉긴 고욤을 펑펑 눈 쌓이는 밤에 퍼다 먹는 것은 사실 과육에 버무린 견고한 고욤씨를 먹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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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겨울밤 배고품을 참으며 듣던 할머니의 옛이야기 새참으로 먹던 그 가난한 과당을 섭취하기 위해서 우리의 배설기관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른 봄 거름을 낸 보리 밭 골을 보면 인분(人糞)이라고 친 것이 올올한 고욤씨 뿐이었다.
– – – -누비처네 / 목성균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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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충북 괴산군 연풍에서 태어나 청주상고를 졸업하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중퇴했다. 산림공직생활 25년, 퇴직후 월간에세이( 속리산기, 명태에 관한추억, 행복한 고구마, 돼지불알) 헌대수필가100인 선정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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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적 시간을 되돌려 놓은 것만 같다.
목성균님의 작품 글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나는 고항으로 돌아와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든다.
덕곡, 가시골, 구시골, 달란바위, 목발이 땅에 끌리는 지게를 지고 형들을 따라 산을 올라가면 우리 동네(지소꼬리)는 조그마하게 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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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한수면 덕곡리(지소꼬리) 지금은 충주댐의 건설로 동네가 반쪽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고향을 지키시던 연로하신 어른들은 하나 둘, 작고 하셨고 나는 한 해에 한 번 선산의 벌초 때나 다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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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앞산은 엄청 높아 보였는데, 덕곡을 가서 앞산 반재이 뙈기밭을 올려다 보면 손바닥 같이 작다. 아마 내가 어른이 되어서 그렇지 뙈기밭이 더 작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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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안리 동네에서 앞산을 올려다 보면 뙈기밭 한 가운데, 내 붕알 친구인 대봉이네 집이 있었는데, 내 기억으로는 그 마당에 커다란 고욤나무가 있었다.
그리고 붕알친구 대봉이는 우리반에서 제일 키가 컸다. 아마 대봉이는 고욤나무 과당을 충분이 먹어서 힘도 좋고 키가 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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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코흘리게 대봉이가 저 높은 산비탈의 집에서 매일 나랑 같이 십리가 더 되는 서창국민학교를 어떻게 걸어 다녔나 하고 생각한다. 우리 선산이 바로 대봉이네 집 옆에 있어서 한 해에 한 번 벌초하러 올라 갈 때면 숨이 턱까지 차 올라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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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들판 한가운데 집 터만 남아 있고 무성한 잡풀들이 나무처럼 키가 크다. 올 해도 벌초 하러가서 나는 커다란 고욤나무가 대봉이가 살던 집터를 잘 지키고 있는지 한번 보고와야 겠다.
– – – -종석이 생각 – – – – –
-김종석 독후 노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