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행복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라
1996년 이루어진 그 연구는 신경과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새로운 발견이었는데,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의 지아코모 리졸라타와 비토르 갈레즈가 인간의 몸에서 발견되지 않던 ‘거울신경’을 찾아낸 것이다.
‘보는 대로 따라 하는’ 신경이라고도 불리는 이 민감한 신경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뿐만 아니라 어떤 행동을 보거나 듣거나, 심지어 누군가 어떤 행동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 작동하여, 그 행동을 몸으로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뇌의 여러 부분에서 발견되는 거울신경은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특수한 기능을 수행한다. 우측 두정판개의 거울신경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파악하고, 그 사람의 행동에 맞추어 우리 몸을 움직이게 하는 작용을 돕니다.
우리는 성장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여러가지 감정을 경험하고 추억을 만들며 이것들로 우리 뇌속에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살아 가면서 비슷한 상황이나 경험을 하게 되면 저장해 두었던 정보를 꺼내어 상대의 행동을 해석하고, 그 사람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 이에 따라 우리의 반응을 결정한다.
실제로 남들이 하품을 하거나 얼굴을 붉힐 때, 또 울 때 쉽게 따라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웃음 역시 전염성이 강하다.
거울신경 전문가들은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공감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므로, 행복과 자신감을 뿜어내는 사람들에게 자연히 매럭을 느끼고 끌리게 마련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우리 자신도 행복하고 자신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끓임없이 뇌를 개발하여 변화를 주며 뇌의 능력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하지 못할 때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숨지 말고 당당하게 허리를 곧게 펴고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상대의 시선을 바라보라.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라.
그리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을 느끼는 연습을 하고 당신의 반응에 그들도 반응할 수 있도록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라, 꾸준히 연습을 한다면 거울신경은 당신이 ‘소통의 달인’이 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여자는 우뇌와 좌뇌를 아주 복잡하고도 미묘하게 동시에 활용하기 때문에 남자보다 더 빨리 많은 정보를 받아 들인다.
대조적으로 남자는 한 번에 한 쪽 뇌만을 사옹하는 경우가 많다.
미소는 엔도르핀과 세로토닌, 도파민 등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게하는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를 촉진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비언어적 단서를 읽고 거짓말을 알아 차리는 데 능숙하지만, 한편으로 여자들은 그러한 단서를 무시하고 넘어감으로써 오히려 거짓말을 더 믿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왜 그녀는 다리를 꼬았을까> 중에서
-토니아 레이맨-
-김 종석 독후노트-
좋은글 감사합니다
후회 없는 아름다운 삶
후회 없는 아름다운 삶
굳이 세상과
발맞춰 갈 필요 있나
제 보폭대로
제 호흡대로 가자
늦다고 재촉하는 이
자신말고 누가 있었던가
눈치보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고 천천히 가자
사 는일이
욕심부린다고
뜻대로 살아지나
다양한 삶의 형태가
공존하며 다양성이
존중될 때만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이 땅 위에서
너와 내가
아름다운 동행인으로 함께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쪽에 네가 있으므로
이 쪽에 내가 선 자리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서로 귀한 사람
너는 너대로 가고 나는
나대로 가자
네가 놓치고 간 것들
뒤에서 거두고 추슬러 주어
가는 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으리니
굳이 세상과
발 맞추고 너를 따라
보폭을 빠르게
할 필요는 없다.
불안해하지 말고 욕심을 타이르면서 천천히 가자
돌릴 수 없는
순간들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그 자체가 인생을
떳떳하게 하며
후회 없는 행복한
삶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했다면
등수 때문에 인생을
소진시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실패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할 때 끝나는 것이다.
그 고통을 인정하고
고난을 통해
새 힘을 얻어 ‘아자’ 를
외치며 성실하게
땀 흘리는 사람들은
박수를 받아야 마땅하다.
존재를 잃어버리면
가슴을 잃는 것이다.
가슴을 잃어버리면
자신을 잃는 것이다.
자신을 잃어버리면
세상을 잃는 것이다.
세상을 잃어버리면
인생을 잃는 것이다.
삶의 목표는
일등이 아니다.
편안함을 누리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어쩜 우리네 삶 자체가 고통일지도 모르겠지만
– 좋은글 중에서 –
좋은글 감사합니다
탕자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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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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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 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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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만에 새로 보이는 램브란트 그림.
책 추천받고 리서치하다가 알게된 사실들.
각각 다른 아버지의 두손,
강인한 왼손은 아버지의 공의, 정의.
부드러운 오른손은 어머니의 사랑, 온유.
둘째아들의 등뒤에 집중된 빛,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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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탕자의 귀향 by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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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 헨리 나우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그림은 그 사람의 삶을 바꾸었다. 나우웬은 평생 <탕자의 귀향>과 함께 살았고 <탕자의 귀향>을 썼다. 나우웬이 하버드의 교수직을 버리고 죽는 날까지 ‘라르쉬 공동체’에 들어가서 지적장애인들과 함께 살기로 결단하게 된 배경에 이 그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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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은 렘브란트가 나이 먹어 그린 대작으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아버지의 유산을 들고 자유를 찾아 떠난 작은 아들의 생활은 방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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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허비해 버리고 급기야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다. 돼지 먹이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굶주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자기가 떠나온 아버지 집에서 지내던 풍성한 시절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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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집에서는 품군들도 풍족하게 먹지 않았던가. 이렇게 죽느니 아버지 집에서 품군이 되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안고 입맞추며 잔치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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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도 없이 그림을 그린 렘브란트는 위대하다. 마찬가지로 한 점의 그림을 통해 삶과 신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끌어낸 나우웬도 위대하다.
나도 화가로서 렘브란트가 되든지 감상자로서 나우웬이 되고 싶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그림을 그리든지, 한 점의 그림 앞에서 인생을 바꾸는 감상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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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1.8미터, 세로 2.4미터의 큰 화폭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노인이 거렁뱅이같은 사내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거의 눈이 먼 아버지는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말없이 안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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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남루한 옷차림에 겉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같은 모습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깎여져 있고, 다 닳은 샌들이 벗겨져 드러난 발바닥은 부르트고 굳은 살이 박혀 있다.
온갖 풍상을 겪다 돌아온 작은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손에 한없이 따사로운 빛이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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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에는 껴안고 있는 두사람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인물이 서있다. 이 집의 맏아들이다. 그리고 중간에 앉아서 가슴에 손을 얹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포옹을 지켜보고 있는 인물과 하녀인듯한 여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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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이 작품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숨이 막혀 온 종일 이 그림을 떠날 수 없었다.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해석했다. 나우웬이 대학교수의 일을 접고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것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두 팔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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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구경꾼에서 주인공이 되는 일이었고, 회개를 가르치는 자리가 아닌 회개하는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었으며, 소중한 존재로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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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품, 그곳은 “그토록 들어가기 원하면서도 두려워서 차마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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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간절히 열망하고, 소원하고, 갈구하던 것들을 모두 받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악착같이 붙들고 싶은 모든 것들을 놓아버려야 하는 자리였습니다.”(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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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이 그림 앞에서 렘브란트의 고통에 찬 삶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들과 두 딸의 죽음을 봐야 했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내 사스키아까지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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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들 티투스의 유모와 맺은 관계는 그를 더욱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뒤 이어 만난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죽었다.
그러는 동안 화가로서의 명성도 수직으로 추락했고 재정적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젊은 날의 찬란한 성취와 명성의 뒤안길에서 고통스럽고 좌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것은 돌아온 탕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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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탕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즉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가지고 ‘먼 지방’ 낯선 나라에 가서 자신을 비우고 인간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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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 다다른 예수는 ‘의로운 탕자’였다. 그는 상한 몸으로 모든 인류를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이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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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우리 모두가 탕자이며 돌아갈 집이 있고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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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과 칭찬을 받기위해 삶을 허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는 그림 속 아들의 모습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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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인간 존재의 근원에서 멀어진” 탕자이다. 세상의 헛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늘 아버지가 주신 것들로 허랑방탕하는 ‘영적인 가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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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탕자가 비루한 순간에도 끝내 팔아치우지 않았던 ‘단검’은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임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우리도 허리춤에 달린 ‘단도’를 움켜쥐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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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돼지처럼 대접해주길 바라는 자신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돼지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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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큰아들은 망나니 같은 동생을 위해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가 못내 못마땅했다. 그는 늘 아버지 집에서 가사를 돌보아 왔으나 아버지와의 마음의 간격은 크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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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귀향을 보고도 분노와 시기와 원망으로 가득했던 그 역시 ‘탈선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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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의 탈선은 동생의 경우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고 본질적이다. 큰아들은 집에 있으면서 집을 나간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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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귀향하기 위해서는 더 멀고 어려운 길을 가야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지팡이를 잡고 있는 그의 오른손에 어둠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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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용서와 사랑이 없는 성도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미 믿는다는 사람에게 믿음의 길이 더 멀리 있다는 무서운 진실을 큰아들을 통해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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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집을 나가는 아들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말리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아들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무작정 기다리며 애태우는 아버지, 눈물로 나날을 견디며 고통에 찬 삶을 사신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사죄할 틈도 주지 않고 용서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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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한 나머지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이 아버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탕자들을 아무 말없이 껴안는 예수 그리스도와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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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아버지는 차라리 어머니의 성정을 지녔다. 자세히 보면 아들의 어깨에 얹은 아버지의 오른손은 여성의 손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흡사 자궁 속 태아의 모습이다. <탕자의 귀향>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기하는, 즉 ‘존재의 근원’으로 회기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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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에서 대다수 감상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무릎 꿇은 아들에게 투사한다. 또한 자신이 큰아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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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림은 감상자를 아버지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 나우웬은 “아버지는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고, 내 여정의 종착점이며, 마지막 안식처” (219쪽)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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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림 속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향해 우리의 두 손을 펼쳐 용서와 사랑과 치유의 초청을 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되기까지 우리의 영적 귀향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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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사합니다.
2015 광복절에
2015 광복절에
평등(Equality)
문명화되고 개화된 세상엔 노예가 없습니다.
노예란 인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잡혀왔든 팔려왔든 그에게 어떤 결정권이 없습니다. 모든 결정권은 주인에게 있습니다.
이런 노예제도는 문명화되고 개화된 세상에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노예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평등하게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인권에 공의와 정의가 그리고 진리가 실현되지 않을 때 우리의 영혼은 쉼을 얻지 못합니다.
문명과 개화의 세계가 원하는 것은 평등(Equality)입니다. 누구도 내위에 군림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나 자신이 그 누군가의 위에 군림 할 수 도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일제의 억압에서 우리의 인권이 얼마나 유린 되였었던지 그 아픔을 너무 뼈저리게 압니다.
문명의 세계는 평등하며 평등한 세상에서는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자식이라고 가족이라고 말이 통하지 않는 이민자들이라고 내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은 없는지요.
나의 인권이 중요한 만큼 아무리 힘없는 사람 일 지라도 존중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할 것 입니다.
이러한 각 개인의 신념은 진정한 한류의 우등성을 세계에 보여주게 될 것이며 진정 지구촌의 좋은 이웃이 될 것입니다.
평등의 선진적 개념을 인격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개인의 삶 속에서도 사랑받고 존경받는 가족 구성원이 되며 뿌듯하고 행복한 스스로가 되리라 믿습니다.
-편안한 언덕-
좋은글 감사합니다.
You are the branches
다음 속담의 초성에 알맞는 단어를 맞혀보세요
다음 속담의 초성에 알맞는 단어를 맞혀보세요
1) ㄴㅋㄱ석ㅈ
2) ㄷㅁ 삼ㅋㄱ ㅆㅁ
뱉ㄴㄷ.
3) ㄷ로ㅈㄱ ㅁ로 ㅂㄴ다
4) ㄸㅈㄱ ㅎㅇ치기.
5) ㅁㄹ ㅎㄴ에 날 ㅂㄹ.
6) ㅂㅂㄷ ㅂㄲ이 더ㅋㄷ
7) ㅂ주ㄱ ㅇ ㅈ다.
8) ㅂㅈㅈ도 ㅁㄷㅁ 낫다
9) ㅅㄱ이 ㅁㅇ면 ㅂ가
ㅅㅇㄹ 간다.
10) ㅅㄷㄱ삼ㄴㅇㅁ ㅍㅇ을 읊ㄴㄷ.
-삼성병원.뇌신경센터가
개발한 뇌훈련-
치매예방에
도움이 된답니다. 열심히 뇌훈련 해보세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아픈 청춘에게 드립니다
아픈 청춘에게 드립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다보면
길을 잃을 때도 있고
넘어지고 자빠지기도 합니다.
인생을 산다는 건 이렇게 각자의 “길없는 여행”을 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그래서 때로는 아픈 때도 있는 것이지요.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도 길없는 길을 가는 것과 같이 구비 구비 곡절이
많습니다
한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심쿵”이 되어서 대쉬를 하고 내 생각엔 상대방도 나와 같은 마음이려니 생각했는데
어느날 그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이해가 되는 이유이 건만 나에게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이유로 나를 밀어내고 거절한다면 그리고 해 볼 만큼 구걸하고 애원해도 상대방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속히 돌아서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밀어냄을 당하고 거절당했다고 해서 당신이 미운 존제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자신을 지켜주세요. 자신을 학대하지 말고 사랑해 주세요. 하루 속히 미움과
안타까움과 원망에서 도망하십시요. 그의 의견도 내 의견 만큼 중요합니다.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십시요.
나를 위해서 마음을 훔쳐간 상대방을 용서하시고
사랑도 분노도 미움도 버리고 더 큰마음이 되십시요.
따뜻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십시요.
어느날 당신옆에 해를 바라보듯 바라봐 주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편안한 언덕-
“Roadless Travel (길없는 여행)” 이란 말은 심리학자이며 저자인 엠스캇 팩(M. Scott Pack)이 1978년 에 출간하여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는”Roadless Travel” 이란 책에서 처음 출생된 어구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표현한 비슷한 구절이 많겠습니다 만은 특히 잘알려진
Robert Frost(로버트 프로스트 1874-1963)
의 “The Road Not Taken(가본 이가 없는 길)”이란 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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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ith
긍정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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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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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물리는 가난
세상에 대한 불평괴 원망,
웃음기 없는 윤기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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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것이 내일의 내 삶이라
믿는 안타까운 이 저주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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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믿음 을 긍정적 믿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어느 부모가 그 저주의 믿음을
자녀들에게 물려 주고 싶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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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이 믿음을 부모에게서 자연히 유산 받게 됩니다.
앞이 깜깜할 수록 긍정의 믿음을 가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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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우리를 지으신 분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 하세요.
나의 죄를 대신하여 처벌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오세요.
그리고 대화하십시오.
그 것 만이 살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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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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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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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도어 메트가 되지마세요(Do not be a doormat)
도어 메트가 되지마세요
(Do not be a doormat)
서양문화에서는
사람들이 집안에 들어갈때
신을 벗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문앞에 도어메트
(발닦게)를 놓아 둡니다.
그래서
누구의 집이든
들어갈때 확실하게
신발에 묻은 먼지를
되도록 잘 털고, 닦고
들어가는게 예의입니다.
“Doormat”
한국 사전을 찿아보니;
① 도어매트
② 동네북
③ 짓밟히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더군요.
맞아요.
Doormat는
발닦개라는 뜻 외에
동네북, 짓밟히고도
가만히 있는 사람 ” 이라는
통념으로도 사용됩니다.
동네북이 되지 마세요.
(Do not be a doormat.)
내가슴을 철저히
밟고 문지르고 털어내는
그런 발닦개, 동네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용서도 사랑도 할 수 없는
영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럴때 “No” 하세요.
정중하게 사양
(politely decline) 하십시요.
자기의 영혼을
돌봐주고 보호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되십시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절대로 남을 사랑 할 수 없습니다.
-편안한 언덕/이시우-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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