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솔나무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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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 솔나무님 이야기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여름에 수영장에 가고 싶다고 하면 시내 최고급 호텔에 가서 식사를 하고 수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누구와 싸우는 소리가 났고 부모님은 제게 무조건 전화를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 회사가 부도가 나서 빚쟁이들이 아버지를 찾는 전화였고, 누나와 나는 학교로 찾아 올지도 모를 그들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안으시며 “하나님, 이 아이를 잘 보호해 주십시요”라고 눈물로 기도하셨고, 어머니와 누나는 다음 날 미국 이모네로 갑자기 떠났습니다.

1988년 2월 추운 겨울날, 저는 미국 JFK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를 데리러 온 이모부는 낡고 작은 차에 짐을 실었고 우리는 좁은 골목을 지나 아주 허름한 2층짜리 다세대 주택 앞에서 섰고, 그곳에서 11명이 1년을 살았습니다.

한국에서 전교 1등을 하던 누나는 바로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늘 꼴찌만 하던 저는 ABC도 몰랐기에 원래는 6학년에 올라가야 하는 나이에 4학년으로 몇달 뒤 들어갔습니다.

무턱대고 아무 반이나 들어갔는데 6학년 반으로 잘못 들어갔고, 끔직한 저의 학교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식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피아노를 하는 누나가 줄리어드 프리칼리지에 합격해야 했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인지라 교회에서 연습을 하다가 피아노 줄이 늘어났다며 쫒겨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와 누나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두 번이나 떨어졌고 세번째에야 합격을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악몽 같은 학교생활은 더해만 갔습니다. 키도 작고 나이도 어리고 운동도 못하는 동양 아이를 아이들은 괴롭혔고, 쉬는 시간이면 한대씩 툭툭 치고 지나갔습니다.

1달러 25센트의 점심 급식비를 아끼려 어머니는 도시락을 매일 싸주셨는데 아이들은 우유를 내 도시락에 붓기도 했고, 저는 너무 맞아서 귀가 찢어져 피가 나거나 사물함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아이들의 비난과 놀림을 피할 곳은 오직 화장실이었습니다. 하루는 변기 위에 쭈그리고 앉아 하나님께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 내가 미국에 와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요? 누나는 똑똑하게 만들어 주셔서 엄마의 사랑을 받게 하시면서, 왜 저는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해서 맨날 야단만 맞게 하시는 거냐구요!”

저는 울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성령님이 처음으로 제게 오시는게 느껴졌습니다.

‘얘야~ 내가 여기 있잖아.. 너와 늘 함께 있잖아~ 내가 너랑 친구해주면 되잖니?’

음성이 들리는데 서러워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내 이름도 부르지 않아요. 누나의 동생이라고만 해요..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실수로 태어난 거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단다. 나는 네 머리카락까지 세는 너의 하나님이란다. 내가 널 만들었단다’

저는 환청인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친구로 받아들이라는 말씀을 무작정 믿고 의지하고 싶었습니다. 순간 심장이 뜨거워지면서 마음 속 무언가 단단한 반석 같은 게 만들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플루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한국에서 몇 달 배운 게 전부였는데 미국에서 들으니 너무 반가워 그 소리를 따라 밴드부실에 갔습니다.

선생님은 나보고 플루트를 한번 불어보라고 하셨고, 저는 한국에서 도레미파솔라시도와 나비야 정도만 겨우 불었는데 불현듯 한번도 불어보지 않은 애국가의 멜로디가 생각이 나서 불었습니다.

나도 선생님도 놀랐습니다. 선생님은 그 플루트를 주시면서 밴드부에 매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날부터 나는 정말 열심히 불었습니다. 나도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게 기뻤고, 무엇보다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게 더 좋았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나도 줄리어드 프리스쿨 시험을 치고 싶어요”

어머니와 누나는 황당해하며 아무나 줄리어드를 가는 줄 아느냐 레슨비가 얼마나 비싼데 우리 형편에는 불가능하다며 혼을 내셨습니다.

정식 레슨 없이 시험 기회는 단 한번만 준다는 조건으로 겨우 허락을 맡은 저는 정말 열심히 연습을 했고, 시험 보는 날, 어머니는 일을 하셔야 했기에 혼자서 뉴저지에서 맨하튼까지 혼자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저는 쟁쟁한 아이들의 옷차림과 악기, 부모님들의 보살핌에 기가 죽었고 어차피 떨어질거라고 생각해서 제스처까지 해가며 열심히 연주했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들이 박수를 치면서 웃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5분도 되기 전에 끝났는데 저는 전곡을 다 연주했고 한 교수님이 낡고 싸구려 악기를 보시며 빙긋이 웃었습니다.

일주일 뒤 줄리어드에서 온 우편물을 먼저 잡아든 누나는 비웃으며 “야, 불합격 통지가 어떻게 일주일만에 오니? 창피하지도 않니? 이제 엄마 속 좀 그만 썩이고 또 시험 치겠다는 소리 절대 하지마”

경험이 많은 누나는 줄리어드에 붙으면 한 달이나 두 달 후에 연락이 오고, 떨어지면 2주일 뒤에 연락아 온다고 했기 때문에 저는 당연히 떨어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의 통곡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혹시 아버지한테 온 편지를 보고 우시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를 보더니 갑자가 끌어안고 우셨습니다.

“얘야, 네가 줄리어드에 붙었어. 그것도 장학금을 받고”

저는 그렇게 13세에 줄리어드 프리스쿨에 들어갔습니다. ?

세계적인 플루리스트로서 부와 명예를 다 누릴 수 있음에도 가장 낮은 곳을 찾아다니며 영혼을 울리는 연주로 복음을 전하는 그..

드라마 <허준>, <이산>, <동이> 의 메인 연주와 많은 영화음악을 작곡한 그..

왕따에서 줄리어드 장학생으로,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빈민촌 거리로.. 8년 동안 전 세계 80개국, 2년 간 일본에서 200회 연주하며 오직 단 한 분의 청중만을 위해 연주하는 그…

그는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2013년 <하나님의 연주자>란 간증책을 발간한 “송솔나무” 집사입니다.

교수들로부터 천재라고 칭송 받았던 그의 인생은 과연 줄리어드 입학 후 탄탄대로였을까요?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이야기 내일 계속됩니다.
오늘의 기도문은 송솔나무 집사님의 책 <하나님의 연주자>에 나오는 감동적 프롤로그로 대신합니다.

♣하나님의 연주자는
‘연주’라 하지 않고 ‘찬양’이라 한다.
‘공연’이라 하지 않고 ‘예배’라고 한다.

연주를 통해 ‘감동’을 주는 자가 아니라
찬양을 통해 ‘은혜’를 끼치는 자다.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자다.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을
음 하나하나, 호흡 하나하나,
몸짓 하나하나에 실어 전하는 자다.

그는 이 일을 봉사라 하지 않고 사명이라 한다. 실력과 경험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으로 한다. 자기의 상태에 상관없이 순종으로부터 오는
기름부음과 은혜로 한다.

세상 연주는 하면 할수록
피곤하고 지치나
찬양은 하면 할수록
능력이 나타나고 천국 문을 연다.

그는 사람들의 반응이 아니라
성령님의 반응에 민감하다.
사람들의 박수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를 보며 천국의 소리를 들으며
가장 어둡고, 힘든 곳에서 도전을 받는다.

악기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하며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린다.

스스로 위대해지려 하지 않고
크신 하나님께 사로잡혀 그분께 순종하며 따라간다.

하나님의 연주자는
세상의 큰 무대가 아닌
하나님께서 서라고 하시는 곳이
가장 큰 무대임을 안다.

또한 무대 위에서나 자기 삶에서도
늘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자다

은혜로운 간증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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