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공해

문학의 공해

시를 쓰는 사람이 많다.
한 해에 발표되는 시가 2만 편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시단에는 여러 통로로
새로운 인원이 줄곧 들어선다.

이런 시단에서 한 가지 현상을 접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시를 ‘쓰는’ 데 관심이 그나마
높지만, 시 자체에 대해서는 공부나 고민을
별로 하지 않는 현상이다.

시란 무엇인지, 좋은 시가 갖출 요건,
나쁜 시가 나쁜 이유는 뭔지…
진지하게 따지고 익히는 이는 자주 볼 수 없다.
이런 풍토는 시와 시인은 늘어도 독자는 줄고,
문학적 성취, 숙성과 상관이 없다.

작품은 항상 어느 수준을 유지하여야만 한다.
아니 지금까지 생산된 것보다 더 좋아야 한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뻔한 소리, 남이 이미 다 말한 소리,
자신도 이미 여러 번 우려먹은 시시한 소리,
쓸데없는 말장난, 한 줄로 써도 될 것을
공연히 두 줄로 띄워놓는 일,

더럽고 음란한 말을
이유없이 서슴없이 하고는
자기가 마치 크게 자유를 신봉하거나

마음이 탁 트인 선구적 사상가인양
행세하는 일,

자기는 가난하니까 정직하고
어떤 사람은 부자니까 도둑놈이다
하는 식의 궁상,

되지도 않는 비유를 해놓고도
부끄러워 할 줄조차 모르는
뻔뻔스러움,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틀린 문장이나
온갖 단어의 조합 수준의 글을 써놓고는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의 출제자라도
된 듯한 착각들,

과연 무슨말을 하려는지 알수가 없는
잡글 수준의 허무맹랑한 글의 구성등,,,

이런 것들로 계속 지면을
그 분량을 늘려가는 식의 다작은 한 마디로

“문학의 공해”라
아니할 수 없으며,

이런 경우에 골탕먹는 사람들은
그저 그 속에서 무엇인가 건져보려는
선량한 독자들뿐이다.

절제는 술주정꾼에게만이 아니고
모든 종류의 천재에게도 엄숙히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이다.

모든 종류의 명성이 다 그러하듯이
글을 쓰는 사람이 누리는 명성이란 것 또한
지극히 허망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만도 현재
수천여 명이 훨씬 넘는 시인이 있으며,
이들 모두는 제각기 자신이 쓴 시가
다른 사람이 쓴 것보다 우수하다고
확신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매일 꾸준히 시를 쓰고 있으며,
기회가 닿는 대로 발표도 하고,
그 발표한 것들이 모이기가 무섭게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 출판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가운데서
얼마만한 분량이 읽히고,
제대로 감상되며,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사랑을 받고 또 후세에까지 살아남아 있을
것인가를 조용히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지금처럼 열불나게 써서 정신없이 발표하는
자신의 행위에 한 번쯤 회의를
느껴봄직도 한 일이다.

소동파(1036~1100) 하면
“적벽부”로 잘 알려진 송대의 시인이었다.

이 별로 길지도 않은 “적벽부”,
길게 늘여 인쇄해 보아야 2페이지 정도,
하지만 이는 중국 시문학사상 최고의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소동파가 죽은 후 그의 집에서
커다란 나무 궤짝 두 개가 나왔다고 한다.
열어 보니 “적벽부”의 초고, 즉 연습용
원고가 가득 들어 있었다고 전한다.

천년 전에 이미 소동파는 글쓰는 행위에
있어서 시공을 초월하여 가장 중요하고
필수불가결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하여 두 궤짝이나 되는
종이를 없애며 다듬고 또 다듬었다는 사실,,,,,

“적벽부”로 얻은 소동파의 불후의 명성이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소위 글쓰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봐야할 싯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과연 하루에도 몇편씩 쓰는
다작이 좋기만 할까~~^^
또 하루에도 수개씩 글을 게시하는게
모두에게 얼마나 좋은 일 일지~~^^

다같이 한번쯤 생각해 볼 때입니다.

From: 雲亭 朴 來然 page.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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