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 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백기행-
(1912-1996)
<분단으로 잃어버린 시인>

좋은시詩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Photo from app>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