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땅을 떠나오며

착한 땅을 떠나오며

무더웠던 여름이 서서히 저문다.아니 가을
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어느덧 새벽마다
서늘한 바람이 얇은 이불을 헤집고 들어와
자꾸 몸을 웅크리게 한다. 이런 느낌을 나는
사실 좀 즐긴다. 새벽 잠결에 느끼는 가을
이 나를 조금 설레게 하기 때문이다. 며칠
비가 오라가락한 뒤엔 아침과 저녁 공기에
서 초가을 냄새마저 짙다.언제나 그랬지만
가을에 대한 나의 계절감은 어김 없이 피
부로 먼저 느끼고 이어 후각으로 인지한다.

얼마간 다큐멘터리 촬영 때문에 시카고를
거쳐 미국 중부 밀워키 지역에 다녀왔다.
이 지역의 90%를 차지하는 독일 이민자들
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 원주민이
었던 인디언들은 이곳의 지명을 미로아키
(miloaki)라 불렀다. 그들의 언어로 ‘착한
땅’ 을 의미한다. 바다처럼 넓은 미시간 호
수를 접했으니 사시사철 무리지어 살기에
아마도 최적의 환경이었을 것이다.그들은
이 ‘착한 땅’에서 자손대대 번영을 꿈꿨을
것이며 그런 땅을 소유하게 해준 조상이나
그들의 신에게 늘 감사하며 살았을지도 모
른다. 그러나 불행이도 가을이 깊어가는
밀워키 어디에서도 나는 원주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북미 대륙의 다른 인디
언들처럼 그들도 오랜 삶의 터전이었을
‘착한 땅’ 을 독일계 이민자들에게 빼앗긴
채 그저 음습한 지역 박물관 같은 곳에서
박제된 기억으로만 남겨져 있었다.

촬영 중간에 밀워키 시 외곽에 있는 노천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고 음료수 한 잔을
마셨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부영화나 간단히 정리된 미국의 역사
를 통해서나 접했던 북미 인디언들의 비극
적인 역사가 결코 그들만의 일이 아닐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내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힘겹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도 어느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인디언들의 비운적 삶
을 따른다. 자연으로부터 거저 얻은 영토
를 희망 속에 일궈냈으나 결국 침략자들
에게 모조리 빼았겨야 했던 구슬픈 삶과
다르지 않다.

생각해 보면 나와 당신도 세상에 태어나
이름을 얻는 순간부터 개개인의 삶에 있어
각자의 땅을 소유하는 원주민이 된다.나의
영토 그리고 당신의 영토가 있다.나와 남의
삶엔 분명한 차이가 있고 구분되는 경계가
있기 마련이다.물론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
람인지 도대체 어떤 땅을 소유하고 있는지.
그 땅이 ‘착한 땅’인지 ‘나쁜 땅’인지에 대한
자각조차 없다면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남과 다른 나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남에게
서 나를 지켜내는 일도 어려움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나이를 불문하고 우린 끊
임 없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며 살피
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요즘처럼 찬바람이 불어올 때 두터운 옷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처럼 시대의 변화에
도 민감해야 하루 아침에 우리의 영토를 빼
앗기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다.

물론 노력을 다하고 철저히 대비해도 우린
매일 우리의 영토를 조금씩 무엇인가에 빼
앗기거나 마지못해 양보하면서 조금씩 잃
어가는 삶을 산다.더러 누군가는 애초 자신
의 고유한 영토가 있었는지도 모른 채 자신
의 영토가 아닌 남의 땅에서, 평생 자신의
삶이 아닌 남의 삶을 살기도 한다.아니 생각
보다 많은 사람들이 획일화 된 사회에서 그
저 하나의 부속처럼 나의 고유함을 잃은 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만 충실히 하다가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이런 삶이라면 그 끝
도 쾌쾌한 지역 박물관 유리 상자 안에 위태
로운 기억처럼 전시된 채 서서히 시간과 함
께 소멸되어 가는 인디언들의 운명과 다르
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린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삶
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처음의 빈손과 마지
막 빈손은 같은 빈손이 아니다. 같을 수 없
다. 그 차이에 대해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
이라면 자신의 고유한 영토에 대해서도 잘
알고 이해하는 아는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촬영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미시간 호반 광장 한곳에서 어둠이 내리는
하늘 복판으로 폭죽 여러 개가 쏘아올려졌
다. 지상에서 하늘로 솟아 오른 폭죽은 기
껏해야 5초 정도 전력을 다해 불꽃이 되어
산화했다. 너무 신비롭고 또 아름다웠다.
그래서 한동안 광장의 많은 사람들이 넋을
잃고 그 검은 하늘의 불꽃을 지켜보았다.
나도 한동안 그렇게 하늘의 불꽃을 지켜보
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콧등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속으로 가을 때문
이라고 생각했다. 가을을 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글/김감독 DP

좋은글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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