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미>
중학교 시절,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가족 모두 안방 아랫목에 앉아 빨간 담요에
발을 넣고서 귤을 까먹으며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날의 영화 제목은 기억
나지 않지만 영화 속 장면 하나가 사춘기로
접어들던 제게 조금 충격적이었습니다.
영화 속의 여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의
집을 방문하려고 길거리 공중전화 부스에
들려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하지만 여
자는 그 남자에게서 갑작스레 이별을 통보
받습니다.심지어 그 남자는 새로운 여자 친
구에 대해 그 여자 주인공에게 한참 떠들어
댑니다.
여자는 그 남자와의 전화가 끝나자 망연자
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잠시 섭니다.여기
까지는 제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실연의 아픔이란 것은 연애를 경험하지 않
았던 저도 어느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그 여자 주인공이 길의 방향
을 잃고 잠시 우왕좌왕하다가 근처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달려가서는 목을 밀어 넣고
컥컥 멀미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 저는 버스를 탈 때 말고는 달리 멀미
를 경험한 기억이 없던 터라 그 장면이 정말
이상했습니다.그래서 영화 감독이 혹시 변태
는 아닐까 뭐 이런 쓸 데 없는 생각까지 했습
니다.
세월은 역시 번개처럼 흘러갔습니다. 저도
어느새 청년이 되었고 연애를 하게 되었습
니다. 그러나 서툴게 시작했던 저의 연애는
생산지 불명의 싸구려 베터리처럼 잠시 마
음의 램프에 노란 불을 타오르게 했으나 얼
마 지나지 않아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지
상의 모든 연애가 그렇지만 마음을 더 많이
준 사람의 상처가 깊습니다.그날 저녁 상대
와 헤어져 걷던 강남의 어느 거리에서 저는
멀미를 했습니다. 마침 키가 높지 않은 쓰레
기통이 보여 그곳에 머리를 넣고 컥컥 뭔가
를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에서야 오
래전 주말의 명화에서 봤던 그 장면이 떠올
랐습니다.결국 쓰레기 통에 머릴 넣고 웃으
며 이렇게 혼잣말을 했습니다.
“슬픔이 뭔줄 제대로 아는 감독이었어!”
물론 같은 슬픔에 모두가 멀미를 경험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좀 예민한 사
람들이 뜻하지 않은 정신적 충격에 그런 증
상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짐작할 뿐입니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의 슬픔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픔이란 더 완전하다는 느낌
에서 덜 완전한 느낌으로 옮겨갈 때 느껴지
는 감정이다.” 쉽게 말해 슬픔은 우리가 나
약하고 부족한 인간임을 깨닫게 될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입니다. 뜻하는 대로 잘 살아
가는 ‘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종종 자신
의 본분을 잊고 행동하다가 화를 자초해
‘을’의 입장으로 추락할 때 우린 그것을 비
극이라고 부릅니다.그래서 쉐익스피어 때
부터 요즘 우리가 보는 안방 극장의 드라마
까지도 주로 비극의 주인공은 지체 높은
신분의 인물이 맡습니다.대기업의 회장 또
는 후계자,정치인과 전문직 종사자들이 비
극의 주인공을 맡는데 그 정도는 되야 나락
으로 떨어진 그들의 운명, 그 슬픔의 무게
를 우리가 더 크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연이어 법의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집을 나서는 순간
부터 검찰청의 출입문으로 들어가고 조사
후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까지 생중계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봄날에 원하든 원하지
않던 생생하게 비극의 주인공을 지켜봅니
다. 어떤 사람은 대한민국이 부끄럽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왜 매번 정치
보복을 하는지 안타깝다고도 말합니다.아
무래도 대개의 사람은 ‘행복한 결말’을 기
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대통령 신분이었던 저
사람은 검찰의 조사를 받는 동안 과연 멀미
를 했을까?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전직 대
통령도 멀미를 할까? 그리고 지금 가장 슬
픔이 큰 사람은 저들일까? 아니면 저들을
대통령으로 뽑았던 국민들일까? 곰곰히 생
각했습니다.
-글/김감독-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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