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옥림 우리네 사는 이야기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혼하게 된 시인 김옥림이 이혼 후 겪은 고통을
한 권의 책에 절절하게 담았다.
이혼 후 그는 가정이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이혼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혼하지 마라! 이혼은 미친 짓이다!”라고.
23세 때, 만난 지 두 달 만에 운명처럼 결혼
마치 동굴 같다. 컴컴한 아파트에는 인기척이 없다.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대답이 없는 아파트. 열쇠로 직접 문을 열고, 내 손으로 불을 켜야 한다. 내가 들어가기 전에는 집 안에 항상 불이 켜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불 켜진 집이 따뜻하다는 것을 이제야 느낀다. 불을 켜고 아무도 없는 방에 들어가지만 30분을 못 견디고 나온다. 그리고 무작정 걷는다. 불이 꺼진 집은 들어가기조차 무서운 동굴 같다.
가족과 가정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혼자다. 나는 결혼 20여 년 만에 ‘이혼’을 했다. 내 생의 전부였던 아들, 딸을 맘껏 볼 수도 없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힘이 돼준 아내의 든든한 말 한마디도 느낄 수 없다. 이혼은 이렇게 사람을 고독하게 만든다는 것, 불 꺼진 아파트에 들어갈 때마다 느낀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느껴보지 못한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라는 테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일찌감치 깨달았다.
아버지는 내가 네다섯 살 때부터 집에 안 계셨다. 아버지라는 호칭 대신에 ‘행방불명자’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었다. 어디에 계신지, 무엇을 하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자유당 시절, 야당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모진 탄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재산을 탕진한 채 집을 나가셨다.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것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였다. 열일곱 살 되던 해 행방불명됐던 아버지를 우연히 찾았다.
아버지를 만나면 아무런 감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만남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아버지의 ‘정’을 그때 알게 됐다. 하지만 1년 만에 고혈압으로 쓰러진 아버지는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아버지가 가정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됐다. 내가 결혼을 하면 가족과 가정에 충실한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자신에게 수도 없이 반복했다. 아버지의 부재가 아버지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 것이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은 1980년 8월 여름, 교회 여름 수련회에서였다. 그녀는 무척 상냥하고, 밝았으며 친절했다. 그녀의 첫인상은 나를 사로잡았다. 우리는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했다. 당시 난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신학생이었다. 처가의 반대가 무척 심했지만, 우리는 사랑했기에 결혼했다. 처가의 승낙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부모님 대신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 서약을 하고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후 신학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군대 복무를 마치고 대기업에 입사했다. 어떻게 먹고 사느냐는 고민으로 신학생 생활을 그만둔 것이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큰아들 유일이가 태어났다. 생활은 안정되고 모든 것이 행복하기만 했다. 15평 아파트를 샀고, 몇 년 후에는 32평으로 옮겼다. 그러는 동안 내 사랑하는 딸 유리가 태어났다. 나를 유난히 싫어하시던 장모님도 대기업에 다니는 사위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아내와 아이들이었다. 아들은 피아노를 전공했고, 딸은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리집은 ‘행복’했다. 생활이 안정되자 그동안 마음속에 묻어둔 ‘꿈’이 다시 생겼다. 바로 ‘문학’이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전업작가 된 후 경제적 어려움이 이혼 원인
전업작가로 변신하고 싶은 소망을 아내는 지원해줬다. 대기업을 퇴직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경제적 어려움을 의미한다. 아내는 내 대신 일을 시작했다. 나는 강의와 글을 쓰면서 부족한 살림에 보탰다. 아내는 화장품 가게를 시작했지만 장사가 잘 안 됐고, 피아노를 치는 아들의 교육비 때문에 생활비가 부족한 지경에 이르렀다.
항상 행복하던 우리 가정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균열이 생겼다. 아내는 회사에 취직했고,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때부터 우리는 다투기 시작했다. 하지만 큰 아이가 고3이 되자 아내는 외출을 자제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큰아이가 원하는 학과에 입학하자, 아내와 나 사이의 싸움은 다시 일어났다.
이때부터 아내는 서로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별거’를 원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내를 정말 미워할 것 같아 별거를 결정했다. 당시에는 아이들이나 친척들 모두 이 사실을 모를 정도로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별거 후 아이들의 생계가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에도 빚은 약간 있었지만, 아내의 뜻에 따라 삼겹살 전문 식당을 차려줬다.
때마침 시작된 경제 불황 탓에 식당은 5천만원의 빚만 남기고 문을 닫았다. 그동안 진 빚을 합하면 모두 1억3천만원이 넘었다. 아내는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렸고, ‘이혼’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이혼만은 안 된다고 설득도 했지만, 우리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기에 이혼을 했다면 누가 믿겠는가.
아이들을 먼발치에서나마 보기 위해 아내와 아이들 집 주변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가족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는 ‘자살’도 생각했다. 약국을 돌아다니면서 수면제를 모았고, 소주병을 들고 여관방에 들어갔다. 깨어나보니 수면제는 방 안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소주병은 방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나에게 남은 것은 ‘문학’ 뿐이다.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 따뜻한 가정이 그리울 때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이혼한 후 3년 동안 8권 분량의 글을 썼다. 그러지 않으면 ‘사생결단’이 날 것처럼 글을 써댔다. 저체중으로 태어나 고생했던 딸 유리는 나를 지탱해준 힘이다. 전화로 “아빠, 밥은 먹었어?”라며 밝게 안부를 묻는 유리의 음성은 내가 쓰러질 때마다 일으켜준 힘이었다.
마흔여섯 살의 이혼남, 내가 느낀 것은 ‘이혼만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 후 3년 동안 겪은 아픔과 고민을 「불 켜진 집은 따뜻하다」라는 책에 담았다. 결혼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 결혼을 한 사람들이 나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써내려갔다.
이혼한 지 3년, 아직도 불 꺼진 빈 집에 들어가기 싫다. 혼자 밥 먹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처량하다. 이혼이 나에게 남긴 것들이다.
시인 김옥림은
1993년 시 전문 계간지 「시세계」와 1994년 「문학세계」에 시와 수필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후 시집 「나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만남이고 싶다」 「그대가 있어 나는 행복하다」 「따뜻한 별 하나 갖고 싶다」 「나는 당신의 사랑 안에서 당신만의 사랑이고 싶습니다」 등을 펴냈다. 현재 강원도 원주에서 혼자 살면서 작품 활동중이다. 제7회 치악예술상(1995), 아동문예문학상(2001)을 수상했다.
글 / 최영진 기자 사진 / 지호영
-출처: 레이디 경향-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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