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극장> 열네 번째 이야기
입시 준비로 바빴던 고 2의 여름이었다. 학교
철책 너머 산길에서 중년의 한 사내가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 이른 새벽녘에 이웃 주민이
약수터를 향해 가다가 우연히 그를 발견해 경
찰서에 신고하면서 등교 시간 직전에 그 중년
사내의 시신이 수습 되었다. 만일 주민의 신고
가 조금만 늦었다면 등교길의 많은 학생들이
운동장을 지나면서 나무에 목을 맨 채 혀를 내
밀고 죽어 있는 그의 끔찍한 모습을 보았을 것
이다.
“우리학교 선배인가? 왜 하필 철책 너머 학교
운동장을 보면서 죽을 생각을 했을까?”
체육시간 축구경기 직전이었다.어느덧 기장이
짧아져버린 체육복을 입고 현수가 내게 그 중년
사내의 죽음에 대해 물어왔다. 나는 사내가 목을
맸다는 나무 쪽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글쎄…어쩌면 아주 억울한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억울함을 알아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야.”
”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며 까지 세상에 말하고
싶었던 억울한 일이란 건 뭐였을까? 내가 보
기엔 다 부질 없는 욕심인 거 같아. 살아서 버
티게 해달라는 것 말고 우리가 세상에 더 바
래야 하는 게 있기나 한가?”
현수는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축구공을 있는 힘껏 공중으로 차올렸다. 여름
햇살 속으로 잠시 사라졌던 공이 텅하고 바닥에
떨어지자 녀석은 운동장 중앙쪽으로 그 공을 빠
르게 드리블하면서 달려나갔다.
현수는 어느덧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말하는 법
을 알고 있었다.아니 입는 옷, 말투와 행동 모두
어른스러웠다. 그 즈음 학교에 퍼진 소문에 의하
면 자신보다 나이가 서 넛은 더 많은 여대생과
교제중이며 둘이 이미 잠을 잤다는 소리도 있었
다. 하지만 나는 현수에게 단 한 번도 그 소문에
대해 직접 묻지 않았다. 녀석이 먼저 떠도는 소
문에 대해 내게 입을 열기 전까지는 눈을 감아
주거나 귀를 닫아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리고 언젠가 희주가 물어올 질문에 대해 시시콜
콜 대답해야하는 불편한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현수는 예전처럼 내 자취방을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에 대한 소문이
더 자주 내 귀에 닿았다. 최근 어디에선가 너무
근사한 기타를 구해 미친듯 기타 연습에만 몰
두하고 있다는 이야기부터 조만간 지역의 한
록밴드 오디션을 볼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나는 점점 시간이 갈 수록 더 극심한 대학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철이 늦게 드니 삶의 중요한 순간마
다 진중해야 하고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늘상 마음의 채
찍이 되었다.
7월의 주말 오후, 나는 무더운 자취방에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여름학기 기말고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그런데 누군가가 내 자취방
창문으로 작은 돌을 던졌다. 오래간만에 날 찾
아온 현수인가 싶어 대문을 열었더니 희주가
한 손에 보온병을 들고 서서 웃고 있었다.
“시험 공부하고 있었지? 집에서 미숫가루에
얼음을 넣어 이걸 만들어 봤는데…어때?
시원할 거 같지 않냐?”
“고마워.그렇지 않아도 뭔가 시원한 게 마시
고 싶었던 참이었는데…잘 마실게!”
“혜준아, 그런게 오늘은 네 방 구경 한 번 하자!
괜찮지? 잠깐만 있다 갈게.”
희주는 어느날 덜컥 내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나 혼자 지내는 공간으로도 덜컥 들어오려고
했다. 늘 그랬듯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안 된다
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날 저녁의 나는 구차한
핑계 하나 없이 희주에게 내 방문을 열어주었다.
내 방에 들어온 희주가 유독 관심을 보인 것은
역시나 그간 내가 써둔 습작들과 책꽂이에 빼곡
한 책들이었다.
“어머, 이 책.. 전혜린의 유고 산문집 말야. 아무
리 봐도 내 책 같은데. 이 비닐 커버도 내가 만든
거고. 이걸 잃어버리고 한참 찾았었어. 이게 어떻
게 여기에 와 있지?”
정말 놀랍게도 희주가 내 책꽂이에서 뽑아든 책
은 오래전 독서실에서 돌아오던 밤길, 언덕길을
오르다가 주운 전혜린의 유고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였다. 희주와 관련된 모든 것
들이 내게 특별했던 시절이었으니 그날 전혜린
의 책은 나와 희주 사이의 어떤 운명적인 인연
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책을 주운 다음 날, 단번에 다 읽었어. 너무
인상 깊었거든.그래서 책의 주인은 어떤 사람
일까 잠시 궁금했었는데..그게 너라니…”
“그러게. 세상 정말 좁고 신기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냐?”
“전혜린…진짜 멋지더라. 그 시절에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까?”
“그치? 난 그 책을 읽고 언젠가 꼭 독일 뮌헨의
슈바빙이란 곳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이방인
에게도 따뜻하다는 그 지역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도 여럿 만날 수 있
다면 좋겠어”
“사랑하는 사람들? 하나가 아니고 여럿?”
“누구든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게만 해준다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살아 있는
동안엔 그보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은 없을 테
니까.”
희주가 돌아가고 나는 보온병의 뚜껑을 열지
않았다. 희주가 내게 해준 말 때문이었다. 알 것
도 같고 또 전혀 모를 것도 같았던 그 복잡한
말 때문이었다.그 순간 학교 운동장 철책 너머
산길에서 목을 매고 자살한 중년 사내 생각이
났다. 그는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잃고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희주의 말대로라면 그는
어쩌면 사랑을 잃은 것이다. 그가 세상에서 숨
을 쉬며 살아 있게 도와줄 사랑을 놓쳤기 때문
에 그는 더 살아갈 수 없었는지 모른다는 생각
을 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희주와 현수의 얼
굴도 함께 떠올랐다.
그해 여름방학을 앞두고 나는 희주가 다니던
학교의 기악부에서 주최한 소규모 연주회에
초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으며 동시에 가장 마음 아팠던
연주를 접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글/ 김감독 DP
*새로운 메뉴 페이지 ‘Korean Posts 우.사.이’
(우리네 사는 이야기)에 15편 까지 올렸습니다.
즐거운 추억여행 되십시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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