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극장> 열두 번째 이야기
그날 바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따뜻했다.
우리 둘은 서로 어색할 만도 했는데 버스와 지
하철 안에서 내내 웃고 떠들었다.어느덧 밤 10
시 가까이가 되어서야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에 도착했다.지하철에서 내리면서부터 난 이제
꿈 같았던 나의 하루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 혜준아,고마워! 아마도 난 오늘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아!”
희주가 집 앞에서 대문의 벨을 누르기 직전 날
꼭 끌어안고 내 귓가에 그렇게 말했다.오늘을
기억할 거라고,오래 기억하게 될 거라고 했다.
이어 벨소리가 울렸고 희주의 어머니와 언니
가 달려나와 희주의 늦은 귀가를 타박하는 소
리가 들렸다.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문이 닫히는 것까지 확인하고 자
취방으로 돌아왔다.
“어라? 이 추운 밤,여태 어딜 돌아다니다
이제 오는 거냐?”
현수였다.자취방 키를 숨겨놓는 곳을 잘 아는
녀석이 내가 방을 비운 사이에 들어와 있었다.
녀석의 손엔 내 습작 시와 틈틈이 생각난 글을
기록해둔 노트 ‘그의 동물원’이 들려져 있었다.
현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나의 글에 대한 관심
을 드러냈다.오래전엔 내가 쓴 글을 보여주면
긁적 긁적 머리만 긁던 녀석이었는데 언제부턴
가는 시 한 편이라도 오래도록 붙들고 진지하
게 살폈다.그뿐 아니라 가끔 내 책꽂이에서 한
보따리씩 책을 빌려가기도 했다.오래도록 함께
어울렸으니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일은 당연
했다.물론 그렇다고 나의 태권도 실력이 검은띠
를 두를 만큼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게다가 현수
는 군에 입대한 형이 두고 간 기타를 꺼내 한창
독학으로 기타 코드와 주법을 익혀가고 있었는
데 하루가 다르게 연주 실력이 좋아졌다.
“혜준아, 너 여태 희주랑 같이 있었지? 오늘 걔
때문에 이 동네 난리도 아니었다.희주 어머니
가 딸 찾는다고 저녁부터 동네 집집을 찾아
다니시며 대문을 두드렸거든.나는 혹시나
해서 여기로 온 거야.근데 네가 없잖아.그래서
희주랑 너랑 둘이 어딜 갔구나 싶었다.”
나는 현수에게 그날 이야기를 들려줄까 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날 있었던 일은 아무
래도 나의 하루였기 보다는 우리의 하루였기 때
문이었다.그래서 잠시 둘이 함께 있었다는 말만
했다.마침 자취방 동편 창문으로 가로등 불빛을
타고 흰눈이 바람에 흩날렸다.나는 가만히 창문
을 열고 오른 손을 편 채 창밖으로 내밀었다.내
손바닥 온기 때문인지 손에 닿은 차가운 눈송이
는 바로 녹아버렸다.나는 속으로 이왕이면 많은
눈이 밤새 쏟아져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수도 일어나 내 곁에 섰다.그리고 내게 오늘
일에 대해 더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를 앞둔 그해 겨울 기어이
우려했던 사고가 발생했다.희주와 현수 그리
고 나 이렇게 셋이 152번 버스 종점 근처에
있는 레코드 가게를 찾았을 때였다. 희주는
영국 듀오 WHAM의 새 레코드 앨범을 찾았
고 오른쪽 어깨에 기타가 든 가방을 짊어맨
현수는 새로운 기타줄이 필요했다.우린 그곳
에서 10분 정도 머물다 밖으로 나왔는데 그만
아랫동네의 종혁이 패거리들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상대는 모두 세 명이었다.레코드 가게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면 그들은 처
음부터 현수를 노리고 있었고 기다렸다.레코드
가게의 문가에 설치된 스피커로 조금전 희주가
구입한 WHAM의 노래가 경쾌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전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희주가
가장 놀란 표정을 지었고 기타를 짊어맨 현수도
굳은 표정으로 뭔가 생각하다가 내게 말했다.
“혜준아, 먼저 희주를 데리고 레코드 가게 안으
로 들어가 있어!”
나는 서둘러 희주를 레코드 가게의 투명한 유리
문으로 들여보냈다.그리고 현수 곁에 섰다.종혁
이가 눌러쓴 야구 모자를 잠시 들쳐보인 뒤 이
마에 난 상처자국을 왼손으로 긁는 시늉을 했다.
그러더니 바로 현수의 명치쪽을 향해 오른발을
힘껏 뻗었다.하지만 그런 공격에 익숙한 현수였
다.왼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현수의 발끝을 잡아
아 몸의 중심을 무너뜨린 뒤 종혁이의 왼쪽 정
강이를 발차기로 공격했다.그것이 시작이었다.
WHAM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레코드 가게 앞
에서 우리 다섯 명은 서로 엉켜붙어 싸움질을
시작했다.늘상 무용같다고 지적 받았던 나의
태권도 발차기가 허공을 오갔고 그 누구보다 날
렵한 현수의 발차기가 연이어 두 상대의 얼굴과
가슴을 가격했다.곧 가여운 내가 누군가의 주먹
에 명치를 맞고 뒤로 자빠지는 순간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거는 레코드 가게 누나가 보였다.
그리고 이어서 레코드 가게의 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나오는 희주가 보였다.그 순간 종혁
이와 현수가 다시 엉켜 붙었다.그 사이 현수의
기타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고 종혁이 패거리
가운데 한 녀석이 그걸 집어서 현수의 머리를
후려치려고 하다가 달려나온 희주의 어깨를 내
리치는 일이 벌어졌다.희주가 바로 아픈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면서 주저앉았다.
종혁이와 엉켜붙어 싸우던 현수가 그 모습을 보
고 깜짝 놀라서 종혁이를 던지듯 밀쳐내고 일어
섰다.그리고 바로 돌려차기로 희주를 공격한 녀
석의 머리를 가격했다.녀석의 손에 쥐어져 있던
현수의 기타가 터엉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
고 이어서 녀석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스피커
에서 울려퍼지던 WHAM의 노래도 끝이 났다.
현수는 먼저 희주를 챙기고 내가 쓰러진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그때 종혁이가 다시 기타를
들어 현수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다시 터엉거
리는 소리다 들렸다.하지만 현수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리고 자신을 공격한 종
혁이 쪽으로 돌아섰다.현수의 이마에서 붉은 피
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종혁이가 주춤거리며
물러서다가 뒤로 넘어졌다.현수는 그때 주변을
잠시 둘러보더니 레코드 가게 옆 수퍼마켓
문가에 세워져 있던 빈 맥주병 하나를 집어들
었다.그리고 종혁이에게 터벅터벅 다가섰다.
모처럼 현수의 눈빛이 무섭게 번뜩였다.오래전
아랫동네 아이들과의 투석전 때 양철판을 팔에
두르고 적진 가까이로 다가서며 돌을 던질 때
보았던 그 눈빛이었다.나는 어떻게든 현수를 말
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현수의 손에 쥐어진 맥주병은 이미 허공에 떠
있었다.나는 몇 차례 현수의 이름을 소리쳐 불
렀지만 녀석은 날 돌아보지 않았다.그리고 잠시
후 현수의 손에 들린 맥주병이 종혁이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주 높은
고음의 첼로 소리를 닮은 비명이 희주의 입에서
튀어나왔고 동시에 맥주병이 현수의 손 위에서
풍선 터지듯 펑 소리를 내며 깨져나갔다.그 때
문에 현수의 손엔 달랑 깨진 병의 주둥이 부분
만 남아 있었다.신기하게도 맥주병은 종혁이의
머리에 닿기도 전에 마술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종혁이었다.하마터면 죽을
뻔 했던 녀석은 바닥에 떨어진 유리 파편을 잠
시 바라보더니 다친 녀석의 패거리들을 부축해
서 자리를 떴다.내겐 그 짧았던 시간 동안에 벌
어진 일들 모두가 실감나지 않았다.그렇게 내가
한동안 정신 없어 하는 사이에 희주가 목에 맨
스카프를 풀어 현수의 이마에서 흐르던 피를 닦
아주었다.그러자 현수는 되려 희주에게 괜찮냐
고 물었고 희주는 여전히 놀란 얼굴을 하고서
현수에게 괜찮다고 말했다.그것이 내가 멀리서
지켜본 두 사람의 첫 번째 풍경이었다.
-글/김감독 DP-
*새로운 메뉴 페이지 ‘Korean Posts 우.사.이’
(우리네 사는 이야기)에 12편 까지 올렸습니다.
즐거운 추억여행 되십시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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