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극장> 첫 번째 이야기
내 마음 속엔 ‘골목극장’이라는 이름의 따뜻하고
노란 네온 간판을 단 극장 하나가 있다.그곳은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308번지에 실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센 개발의 바람을 타고 오래전
사라지고 없다.하지만 여전히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때론 관객으로 때론 배우의 모습을 하
고서 내 마음 속 그 극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북한산이 멀리 내다보이는 갈현동 308번지,
가파른 언덕배기를 10분 정도 끙끙 오른 뒤,
숨을 고르고 “이제 평지다!” 안도할 즈음이면
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이 갈현동의 좁은 골
목이 처음부터 내게 특별했던 곳은 물론 아니
었다.서울의 여느 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범용 가로등 서 너 개에 회색 시멘트 담장들
이 띄엄띄엄 대문들 사이로 서 있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골목이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당시 나는 초등학교 1학년생이었다.
경찰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근무지가 서대문
구에서 은평구로 바뀌면서 가족 모두가 이 동
네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첫날 집을 찾아 들어
가면서 아마도 나는 처음 그 골목길에 첫발을
들여놓았던 것 같다.그러니까 어느날 운명처럼
그 골목이 내 삶에 등장했고 나는 기꺼이 그 안
으로 입장했던 것인데 그때부터 ‘골목극장’의
검고 무거웠던 막은 올라갔으며 그 무대 위로
하나 둘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던 거라고 생각
한다.
제일 먼저 가까운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우리 옆집의 은숙이 어머님이셨다.세째까지
내리 딸만 출산하셔서 아들 낳는 것이 소원이
었던 분이셨다.이삿짐을 옮기며 북적거리는
우리 4형제를 보시고 먼저 관심을 가졌던 것
이 분명하다.아들을 넷이나 출산하신 우리 어
머니에게 분명 묻고 싶었던 ‘비책’이 있었을
거라고 여전히 난 추측한다.종종 바구니에
계절 과일을 싸들고 오셔서 어머니 품에 안겨
주신 것도 그렇지만 어머님을 뵐 때의 표정을
보면 마치 유치원을 방문한 영부인을 접견하
는 원장님처럼 지나치게 겸손을 떠셨다.아마
도 어머니만의 아들 낳는 ‘비책’이 비밀리에
은숙이 어머니에게 전달되었을 테지만 아직
까지도 그 내용만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하나는 아주 잘 안다.어머니의 비책이 전달되
는 동안에 나보다 두 살이 어린 내 쌍둥이 동
생들은 예쁘장한 동갑내기 은숙이에게 홀딱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은숙이 어머니가 부
단히 아들 얻는 비책을 탐구하는 동안에 정작
우리 어머니는 아들 둘을 옆집 은숙이에게
야금야금 빼앗기고 있었던 셈이다.’골목극장’
의 드라마는 이렇듯 시작부터가 복잡 미묘했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흘러 흘러서 간다.어느덧
손 위의 형님은 중학생이 되었다.교복을 입고
제법 코밑도 거뭇거뭇했다.어느날 이 무료한
308번지 사춘기 10대에게도 골목길로 입장
할 때마다 교복을 단정히 입어야 하는 이유가
생긴다.인근 여중에 다니는 여학생 하나가 앞
집으로 이사를 왔기 때문이다.하루는 형님이
하교 후 집에 들어와서는 내내 앞집이 보이는
창밖만 보고 있었다.무슨 일인가 싶었다.그런
데 자신이 먼저 두 어깨를 쫙 펴고는 마치 조금
전에 지구라도 구하고 귀환한 수퍼맨처럼 내게
말했다.
“너…영웅이 뭔줄 아냐? 위기에 처한 여주인공
을 보고 아주 폼나게 위기에서 건져주는 사람이
바로 영웅인 거야.네 형이 오늘 영웅이야.영웅.
이 쉬키야.어린 네가 뭘 알겠냐만은…”
나는 그날 빡빡 머리에 망또 하나 걸치지 않고
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다.
더 기가 막힌 일은 그 영웅에 의해 구해진 앞집
누나가 다음해 여름 방학에 내게 산수를 가르
치는 과외 선생님이 된다.그래서 나는 위기에
처했던 여주인공이 어떻게 영웅에게 구해졌는
지를 듣게 된다.
“아, 그날!…누나가 학교에서 오고 대문을 열려
고 보니까.글쎄 가방에 대문 열쇠가 없잖아.그
때 너희 형이 저 골목길에 짜잔 등장하더라.난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마냥 대문가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어.그런데 갑자기 오빠가, 아니
너희 형이 마치 성룡처럼 후다다닥 담장으로 뛰
어올라서는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철컥 열어주
잖아.내가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거든.근데
그냥 이마의 땀만 한 손으로 쓰윽 닦더니 바람
처럼 사라지더라.우와~ 그날 진짜 멋졌어!.”
그렇게 등교 때마다 늦잠을 자 머리 감는 일보
다 교복 어깨 위에 떨어진 비듬 터는 일에 더 익
숙했던 형이 하교길 ‘골목극장’에선 날렵한 몸놀
림을 자랑하는 앞집 과외 선생님의 영웅이 되었
다. 산수만 배우러간 내게 굳이 팝송과 영어를
덤으로 가르치며 형에 대해 이것저것 묻던 친절
과잉 누나는 종종 열쇠를 가방에 숨기고 위기에
처한 여주인공이 되어 영웅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날 동갑내기 친구가 같은 골목으로
이사를 오고 우린 바로 둘도 없는 절친이 된다.
그런데 어쩌랴? 우리에게 함께 찾아온 질풍노도
의 사춘기 시절…우린 둘다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골목극장’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글/김감독 DP-
*새로운 메뉴 페이지 ‘우.사.이’(우리네 사는 이야기)에
7편까지 올렸습니다. 즐거운 추억여행 되십시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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