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닫힌 눈과 귀를 여는 힘>
-첫 번째 이야기-
1997년 겨울이었다. 이런저런 다큐멘터리
제작을 경험했던 나는 우연히 서울의 한 의과
대학 교수를 만나게 된다.그분은 몽골 지역에
파견되어 의료 활동과 봉사 활동을 이어가는
학교 출신 후배 의사들을 지원하는 프로젝트
를 진행하고 있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같은 대학 선배 의사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놓고 지원이 절실한 몽골지역 병원들과 그곳에
서 활동중인 후배들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입니
다.김감독님이 그곳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
들어주시면 그걸 그 모임에서 상영할 생각입니
다.그 자리에 오실 분들은 모두 성공한 의사들
인데 의료 봉사에 도무지 관심이 없어요.그래서
기금 마련에 어려움이 많습니다.그분들의 마음
을 움직일 수 있는 멋진 작품을 부탁드립니다.”
얼마후 나는 사진 작가 두 분과 함께 몽골을 향
하는 비행기에 올랐다.무엇보다 평소 징기스칸
의 몽골이 궁금했었고 프로젝트 자체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미 성공한
의사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어려운 지역의 의료
서비스를 확대하고 그곳에서 봉사 활동을 펼쳐
가는 후배들을 지원하는 일이니 현실에 안주하
며 살아가는 성공한 의사들의 닫힌 마음만 움직
일 수 있다면 좋은 목적을 이루는 뜻깊은 프로
젝트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우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베이스 캠프를
차리고 수시로 대학에서 지었다는 병원들과 후
원하는 의료원들을 방문하며 부지런히 촬영을
이어갔다.
내게 영상 제작을 의뢰한 대학 측에서는 처음에
최근 현대식으로 짓고 첨단 의료장비까지 구비
했다는 병원 모습을 많이 담아달라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내 작품이 병원 홍보 영상물처럼
만들어지는 걸 원치 않았다.그래서 몽골까지
와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는 젊은 의사들의 모
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으니 그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그래서 다음날 대학
관계자의 안내를 받으며 몽골 오지의 국립 요양
원 한 곳을 방문하게 된다.
체감 온도 영하 40도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다.그런 추위를 뚫고 다섯
시간 이상을 차로 달렸다.혹한으로 달리던 차는
가는 동안에 여러 차례 오작동을 일으켜서 차량
속의 모두를 긴장시켰다.뿐만 아니라 주행장면
을 촬영하기 위해 창문을 열 때마다 카메라 작
동이 멎기도 했다.베터리가 맹렬한 추위를 견디
지 못했으며 창문을 열었다 닫을 때마다 꽁꽁
얼었던 카메라가 차량 속의 습기를 모두 빨아
들이면서 정상적인 촬영을 어렵게 했다.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통해 도착한 국립 요양원
은 중국과 대항해 몽골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국가 영웅들의 후손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부상
을 입은 군인들이 여생을 사는 곳이었다.그곳
사정은 예상보다 훨씬 참담했다.환자들에게 식
사를 제때 챙겨주는 일도 힘들어 보였고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는 커녕 환자들에게 필요한 의약
품을 공급하는 일도 쉽지 않다고 했다.그나마
한국의 젊은 의사들이 그 험난한 길을 달려서
정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하고 환자들을 돌보았
으며 부족한 약을 공급하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들의 활동을 담아
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의대를 갓 졸업하고
온 이들은 원활한 환자와의 소통을 위해 틈틈
이 몽골어까지 배워 쓰고 있었다.병상에 누워
서 죽어가는 환자들의 병세를 물을 때는 그들
의 거친 손을 일일히 어루만지며 따뜻한 위로
의 마음을 전했다.그곳 환자들도 먼나라에서
찾아온 젊은 한국 의사들의 따뜻한 마음에 깊
은 감사를 표하는 얼굴빛이었다.조금씩 카메
라를 든 내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이런
기분은 좋은 시작을 의미한다.
그때 마침 의사 한 분이 한 달전 환자 A에게
처방해준 약을 환자 B가 먹고 있는 것을 알아
차렸다.그래서 그 의사는 바로 환자 A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환자 A는 정말 뜻
밖의 대답을 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전 이미 몸이 많이 좋아졌습니다.그런데 환자
B는 처방 받았던 약이 오래전 다 떨어졌어요.
그래서 제가 먹던 약을 B에게 줬습니다.”
그 말을 듣던 한국 의사가 심각한 표정을 하
고 말을 이어갔다.
“심장병과 폐암은 너무 다른 질환이라 약을
나눠 드시면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때 난 환자 A에게서 받은 약을 먹은 환자 B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았다.그는 오랜 병으로 깡마
른 몸을 한 채 침대에 누워서 이를 들어내고 환
하게 웃고 있었다.그 미소는 마치 엄마 젖을 배
불리 먹은 뒤의 아이 표정처럼 넉넉했고 또 천진
난만했다.그러던 그가 자리에 누워서 나즈막히
말했다.
” 저 친구가 나눠준 약이 제게 더 효과가 좋은 것
같습니다.약을 먹고나서 몸이 더 좋아졌어요.
이번엔 제게도 같은 약을 처방해주세요.”
환자 A와 B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고 병실 창문으로는 눈부신 해가 쏟아져
들어왔다.
카메라 뷰파인더로 환자 A와 B의 표정을 번갈
아 촬영하던 내 마음 속 어딘가가 점점 뜨거워
지기 시작했다.그리고 병원으로 오는 길에 대
학 관계자에게 들었던 이야기가까지 떠올라
갑자기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이 요양원
환자들 대부분은 사실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
으며 다음해 봄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는 이야기였다.삶의 마지막 언덕을 오르
는 그들은 그렇게 난방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추운 병실에서 부족한 서로의 약을 나눠먹으며
위로하고 격려하는 방법으로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죽음을 앞두고 나도 저들과 같은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치지 않고 흐르
는 눈물 때문에 촬영하던 카메라 촛점이 어긋났
고 흐느낌으로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촬영은 점
점 엉망이 되어가고 말았다.하지만 그럼에도 불
구하고 나는 촬영을 중단할 수 없었다.그게 내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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