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아픈 후회

Art by Son, Jin Geol (   )


뼈아픈 후회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해외에 살다 모처럼
한국을 방문하신 어머님 친구분으로부터 독일
에서 만들어진 푸른색 샤프(sharp pencil) 하나
를 선물 받았다.지금이야 해외에서 만들어진
필기 도구가 시중 문방구만 가도 흔하지만 그
때는 워낙에 귀해 모두의 관심을 받았다.

학교에 가져가 친구들에게 자랑할 생각을 하면
서 필통에 넣으려고 했는데 샤프가 필통보다
길었다.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나는 결국
샤프를 자르기도 한다.

신발장 아래칸에 있는 아버지 공구함에 손을 대
려면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형이 필요했다.오후
늦게 형이 학교에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나는
바로 그 샤프를 내밀며 필통에 맞게 잘라 달라고
부탁했다.형은 샤프의 구조를 살피더니 바로 공
구함에서 실톱을 가져다가 본체의 머리 부분을
잘라내고 정말이지 뚝딱 샤프의 키를 줄였다.

“GERMANY..이걸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거냐? 저머니? 게르마니?”

내 필통이 열리자 역시나 교실의 반응은 뜨거웠
다.기껏해야 바다 건너온 필기 도구일 뿐이지만
그 시절엔 일상에서 못 보던 샤프 하나로도 교실
하나 정도는 충분히 시끄러웠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필통 정중앙
에 꽂혀 있던 그 독일제 푸른색 샤프를 잃어버
리게 된다.잠시나마 친구들의 관심을 받았던
물건이었고 어찌보면 내 필통의 주인공인 셈인
데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이건 마치
공연중에 배우가 사라진 무대를 바라보는 관객
의 심정처럼 황당한 일이었고 또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졌으며 결말에 대해서도 초조한 심정이
되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 교실 구석구석을 살펴봤었고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도 꼼꼼히 둘러봤지만
사라진 샤프는 찾지 못했다.무척 허탈했고 또
무척 속상했다. 그렇게 한 주의 시간이 지났다.

오랜 가을 가뭄으로 먼지 펄펄 나는 운동장에
서 뛰어놀다 이제 막 교실로 들어올 때였다.
창가쪽 뒷자리에 앉아서 문제집을 풀고 있던 장
미라는 이름의 여학생 손에 내가 잃어버린 푸른
색 샤프가 쥐어져 있었다.

” 장미야, 그 샤프 말야..아무래도 내 것 같은데
그거 어디서 났니?”

” 이거.. 동생에게 선물 받았는데…”

난 샤프를 잠깐 보여달라고 한 뒤에 실톱으로
잘라낸 부분을 보여주며 그 샤프가 내 것임을
증명했다.하지만 장미는 한사코 동생에게 선물
받은 거라서 내게 돌려줄 수 없다고 했다.갑자
기 나와 장미의 실갱이를 지켜보던 학급 친구들
이 하나 둘 끼어들기 시작했다.아무래도 나와
가까웠던 친구들은 이미 그 샤프가 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훔쳐간 거 아냐? 맞지?”

누군가의 입에서 기어이 나와서는 안 되는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아니나 다를까.한 순간 교실
안의 공기가 싸악 차갑게 변했고 장미는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내가 전혀 예상치
않았던 사람의 손에 잃어버린 샤프가 쥐어져 있
는 것도 놀랄 일이었지만 내가 전혀 예상치 않았
던 상황으로 일이 커진 것이 너무 당혹스러웠다.

장미는 그 일로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평소 말이 적고 내성적인데다 집안 형편이 어려
워서인지 찬바람 부는 늦가을이 됐는데도 반팔
면티만 입고 버티다 내내 감기를 앓던 아이다.
그 정도가 내가 장미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그리
고 얼마 후에 나는 뜻밖에도 동생으로부터 장미
의 손에 쥐어져 있던 그 샤프를 돌려받게 된다.

“내가 형 필통에서 슬쩍 꺼내 썼는데..그걸 운동
장에 흘렸던 모양이야. 한참 찾았는데…형에겐
말도 못 꺼내고..근데 그걸 같은 반 친구가 들고
있더라구.친구 말이..운동장에서 줏었는데 주인
을 찾아주기도 어려울 것 같고 그냥 누나에게
줬는데..다시 돌려줘서 자기가 쓰고 있었대.”

나는 그 다음날,일요일 오후 장미의 집을 찾아
가기로 마음 먹는다.평소 장미와 가깝게 지내
는 아이를 통해 사는 곳을 알아냈다.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교외 지역의 폐공장 자리였다.오래
전 엿기름을 생산하던 곳이라고 들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어느날 갑자기 공장을 돌리던 기술
자들이 모두 그곳을 떠나는 바람에 흉물스럽게
버려진 곳이다.

나는 장미에게 사과하고 싶었다.내가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그날 교실에서 발생했던 사건
으로 장미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내 동생이
필통에서 샤프를 몰래 꺼내 가지만 않았어도 장
미가 학급 친구에게 마음 다칠만한 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이다.어린 내겐 그 미안함이 컸다.무엇
보다 교실에서 친구가 장미에게 내 샤프를 훔친
게 아니냐고 다그칠 때 실은 나도 잠깐이나마
급우였던 장미를 의심 했었다.

사람들이 던진 돌맹이를 맞아선지 늦가을 벌판
에 서 있던 폐공장 외벽은 여기저기에 숭숭
구멍이 뚫려져 있었다.양철로 덮힌 고래등 모양
의 지붕은 붉게 녹슬어 마치 핏물을 뒤집어쓴
모양으로 괴괴했다.공장 앞 마당의 가을 바람은
연신 먼지를 쓸어다 해를 받는 공장 외벽에 냅다
내쳤다.그 소음이 제법 소란스러웠다.나는 그
런 살풍경에 조금씩 주눅이 들어버린다.장미에
게 사과를 하러 먼길을 왔지만 내 발끝은 더이상
앞을 향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장미가 산다는 폐공장 근처에
서 있는데 공장 뒷곁에서 장미가 걸어오는 것
이 보였다.나는 슬쩍 폐 자재가 쌓인 곳으로 몸
을 숨기고 장미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장미는
자기 몸뚱이보다 한참 커다란 고무통을 머리 위
에 이고 오더니 수돗가 근처에 내려놓았다.모두
가 빨랫감이었다.장미는 수도 꼭지를 돌려 물을
틀고는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빨래를 했다.

당시의 11월엔 흰눈이 펑펑 내려도 하나도 이상
하지 않을 만큼 추웠다.그런 추위에 장미는 찬물
에 손을 담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빨래를 한다.
중간 중간 기침이 터져나왔지만 빨래를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다가 결국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뜨거
움이 내 마음 속으로 가득 차올랐기 때문이다.
애초에 장미에게 표현하고자 했던 미안한 내
마음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하지만 나는 그날
어떻게든 장미에게 용기를 내서 사과해야 했다.
그날 부족했던 나의 용기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부끄럽게 하기 때문이다.
글/김감독 DP

좋은글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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