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의 하나님  

전화위복의 하나님

(창세기 五十장 十五-二十一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려 하셨나니.』
(창 五十․二十)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압니다.

요셉은 어릴 때부터 착실한 아이로서
아버지에게 특별히 총애를 입었습니다.

또 이상한 꿈도 꾸었다고 합니다.
가령 자기가 묶은 단은 일어서고
형들이 묶은 단은 그 단에게 와서 절을 한다.

혹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기에게
절을 하더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많은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신 바와 같이
형들은 이복 형들입니다.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이런 상황 아래 요셉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
형들에게 갔다가 그만 형들에게 붙잡혀서
죽을 뻔하고 죽이지는 아니했으나
돈을 받고 멀리 애굽으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일조에 외국의 손 노릇을 하게 되었고
종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착실히 종노릇을 했습니다.

신용을 얻어서 그 가정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 아주 무서운 시험,
청년들에게 있을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시험,
정욕을 통해서 유혹이 들어왔습니다.

주인집 마누라를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그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그 간악한 여자 보디발의 처에게
그만 휘어 잡혀서 오히려 요셉이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쓰고 애굽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길게 얘기할 것 없이
이런 재난, 화를 당하게 되었지마는
여기 요셉이 말한 대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지마는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선으로 바꾸어서 오늘날처럼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이올시다.

사람은 요셉을 해하려고 했고 큰 화가 미쳤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선으로 바꾸어서
오늘날처럼 오히려 내가 그런 화를 입으므로 말미암아
많은 생명을 구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 생활에는 불운 혹은 재난,
화가 종종 있습니다.

그것은 옛날 사람들에게도 있었고
현대인들에게도 있습니다.

교통사고 같은 것은 기계 문명이 발달된
오늘날에 더 많이 있습니다.

이 재난과 화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령, 자연적 원인에 기인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천재 지변이라고 합니다.

지진 혹은 풍수나 풍재(風災)
이런 것들을 말합니다.

이런 것은 우주의 필요 불가결한 자연 법칙의
한 부산물로서 이따금 일어납니다.

그러나 재난의 대부분은
인간 자체에 의하여 일어납니다.

사람의 무지, 욕심, 실수, 무관심,
부주의, 죄, 이런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요셉의 경우는 형들의 질투와 보디발의 아내의 정욕,
이런 죄가 요셉에게 큰 재난을 가져왔습니다.

여기 아파트 도괴(倒壞)사건 같은 것도
인간의 죄악입니다.

욕심이 그런 사고를 저질렀습니다.

교통사고는 대부분 인간의 부주의와
실수에서 옵니다.

음식 중독 사건 같은 것은
인간의 무지에서 일어나는 재난입니다.

다른 여러 가지 질병도 인간의 무지와
부주의에서 오는 재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밖에 우리 인간이 그 원인을 모르는
재난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믿는 사람들이 경계할 것은
재난의 원인은 덮어놓고 하나님께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덮어놓고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그래서 어떤 이는 이런 생각에서
무슨 불행한 일이나 슬픈 일을 당한 후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더러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생기게 했나,
왜 하나님께서 내 아들을 데려갔나?
이런 것은 건전한 사고 방식이 아닙니다.

그릇된 생각입니다.

가령, 모산에서 일어난 교통사고가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마태복음 十八장 十四절을 읽어보세요.
거기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인간의 실수입니다.
부주의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종으로 팔아먹은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란 말을 쓸 때에
조심해서 재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도록
우리 믿는 사람이 주의해야 합니다.

재난은 대부분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요셉의 이 말을 들어보세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재난의 원인은 당신들 즉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사』
하나님의 하신 일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사, 선으로 바꾸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어떠한 원인으로 재난이 인간에게 미쳤든지
하나님은 선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복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떠한 재난이나 화가 미쳤어도,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지혜와 능력과 사랑으로
전화위복이 되게 하십니다.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형들의 죄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팔려 가는 재난을 입었습니다.
화를 입었습니다.

감옥에까지 들어가는 화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신 일이 무엇이지요.

하나님은 이런 모든 형편을 선으로 바꾸어서
마지막에는 오히려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요셉이 자기 민족을 건지는 축복으로
변하게 했습니다.

자기 일족만 아니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까지 건지는
큰 축복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이 재난에 대한 하나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전화위복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요셉의 생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의 생활이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사람들의 핍박을 받아서
오래 로마 감옥에서 고생한 것은
복이 아닙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죄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매
오히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므로 말미암아
자기를 수비하는 수비대 군인들에게 전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가이사 궁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항상 여러 지방으로 전속이 되니까
이렇게 되어서 군인 사이에 그리고 전 세계로
복음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고
옥중에 있는 동안에 사도 바울은
많은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서 오고 오는 세대에
큰 축복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 말미암아 화가 바울에게 미쳤지마는
하나님은 이것들을 바꾸어서
전화위복이 되게 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생활도 생각해 봅시다.

말년에 나이 많은 요한 이
로마 관헌에게 핍박을 받아서
자기 교회에서 쫓겨나고 멀리 불모의 섬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여 굴속에 홀로
외로이 있게 된 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큰 재난입니다. 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었습니다.

육신의 눈은 점점 어두워 오는 요한 은
오히려 심령의 눈은 더 밝아졌습니다.

육의 귀는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의 신령한 귀는 더 밝아져서 하늘의 영광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어서 그 결과가 오늘날까지 남은
요한계시록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으로 말미암아 미치는 화를
복이 되게 하십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바리세인들, 제사장, 서기관들의 시기, 증오, 모략,
가룟 유다의 배신, 빌라도의 무책임한 공판,
이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인간적 견지에서 보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부활이 있게 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통해서
만민의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큰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올시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당하는
슬픔이나 고통이나 질병이나 실패나 재난이라도
언제나 선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전화위복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성 프란시스 같은 이는
부잣집의 아들로서 처음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건 재난이요 큰 화올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었습니다.

병 가운데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성 프란시스가 되었습니다.

여기 천주교를 부흥케 한
로열라 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기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방면으로 공부합니다.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그만 전쟁터에서 큰 부상을 다했습니다.

왼쪽다리를 전혀 못쓰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치료하면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사모하게 되면서 온전히 깨끗한 사람이 되어서
온전히 하나님께 몸을 바치고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기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상필 목사님을 기억하시지요. 그
의 간증을 들으신 분이 많을 거예요.
우리 교회 홍순영 권사님의 주인이올시다.

우상필 목사는 원래 일제 시대에
일본에서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오래 있던 분입니다.

자기의 말대로 은행에 있으면서
오래 방탕한 생활을 했던 분이 예요.

그러다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폐결핵에 걸려 여러 해를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회개했습니다.

그 후에 목사가 되어
여러 해 복음을 전파한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올시다.

이것과 결부해서
우리가 꼭 생각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권능이 계신데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해요.

다시 말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 요셉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 만일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서
종으로 들어갈 때 불평하고 낙심하고
자포자기했던들 요셉이 어떻게 됐겠어요.

일평생 종노릇이나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아무리 종으로 팔려가서 남의 집에서
종노릇을 하면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신앙을 굳게 잡고
깨끗이 살았습니다.

자기 맡은 일은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하나님의 선으로 바꾸는 역사에
믿음을 가지고 협력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우리가 아는 요셉이 된 것입니다.

여기 찬송가에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 오.」란
구절이 있지요.

어떤 재난을 당하든지
어려운 일을 당하든지
내 주 안에 있는 긍휼을
의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음으로 그 재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선으로 바꾸어서
전화위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뿐이 아니 예요.
모든 성도의 생활이 다 그래요.

바울의 생활이 그래요.
바울이 감옥에서 수고했지만
그는 신앙을 지켰고

요한 이 밧모섬에서
유배를 당해서 수고를 했지만
그는 신앙이 있었어요.
모든 성도의 생활이 다 그래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전화위복의 역사에는
인간적 조건이 있어요.

그것은
믿음으로 모든 것을 당해야
이런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진리를 가르치는
유명한 성경구절, 로마서 八장 二十八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거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재난이나 화가와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여기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큰 슬픔, 어떤 큰 실패,
어떤 큰 환난, 어떤 큰 화를 당할 때에
두 가지 길이 우리에게 있어요.

하나는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을 꾸준히 믿고
의지하고 요셉과 같이 꾸준히 나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런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어서 전화위복을 가져옵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일을 당했다고
실망하고 불평하고 자포 자기하면

그 재난으로 말미암아
아주 파멸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다만 시간 문제입니다.
어떤 때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기는 하나
마지막에는 전화위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三八선은
개인적으로 보나 민족적으로 보나
분명히 재난입니다. 화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실수와 죄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연합국 측으로 보면 실수입니다. 부주의입니다.
공산당 측으로 보면 그들의 야욕입니다.

곧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런 죄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민족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믿음으로 이를 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정녕 선으로 바꾸어서
우리 민족 장래에 전화위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회개가 필요합니다.

전도가 필요합니다.

남한 뿐 아니라 북한 동포들에게
전도가 필요합니다.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갈 뿐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우리 하나니은
그 지혜와 사랑으로 반드시
전화위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三八선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이 땅에는
실로 재난이 너무나 많습니다.

불의의 재난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슨 모산 사건 무슨 충돌 사건 식중독 사건 등
이런 모든 것의 대부분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부정, 무관심, 질서, 냉담, 이런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군 관 민 모두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정신을 바로 차리고
바로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아무래도 이 세상은 재난이 없을 수는 없어요.

앞으로도 있을 거예요.
사실 여기 앉은 우리도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모릅니다.

꼭 기억할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아무리 인간의 실수로
내게 화가 미쳤을 지라도

그 자리에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자포 자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로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어서
전화위복이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재난의 세상에서
이와 같은 축복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한경직 목사 설교-

– 한경직 목사 설교전집 10권 中에서
(一九七0년 十월 十八일)

Kyung-Chik Han (1902–2000)was a Korean pastor and church planter and the recipient of the 1992 Templeton Prize for Progress in Religion.

설교 말씀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Photo from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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