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때와 인간의 기회
전도서 3장1절
“천하에 범사(凡事)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
여기서의 ‘때’는 히브리어로 ‘에트’입니다.
자연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드는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때입니다.
‘기한’은 히브리어로 ‘제만’, 즉 기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 살면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시는 기회를
사람이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1-2절에서
BC 700년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계시를 받아서 한 말씀을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사야서 49장 8절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은혜 주실 때 받으라는 것입니다.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외면하십니다.
은혜를 받으면 기도할 때 듣고
응답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은혜 받을 ‘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합니다.
사람이 평생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때’를 주기 위해서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機會), 어떤 일을 해나가는데
가장 알맞은 고비, 언덕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은 우리를 ‘함께 일하는 자’로 여기시고
우리에게 일하는 ‘때’를 주기 위해서 먼저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절대로 안 됩니다.
‘때’는 하나님의 정하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타나는 역사(役事), 그리고 믿는 자 안에서
전개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법칙 안에서
인류의 구속(救贖)을 이루기 위한
역사의 한복판에서, 감추어진 현상 배후에서
인간의 시각 안에 들어와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 ‘때’를 기회를 가지고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에스겔 34:26)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예레미야 5:24)
창세기 2장 2절에는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때’는
① 시간의 어떤 점이나 부분
② 그 당시
③ 어떤 경우를 의미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때입니다 (출애굽기 7:5).
그리스도께서 때가 차매 오셨습니다
(갈라디아 4:4, 이사야 40:7).
가나 혼인잔치에서는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4)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사도행전 1:7),
주님의 날 (베드로후서 3:8, 시편 90:4)입니다.
심판의 때 (베드로전서 4:17)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는
영원하신 때입니다 (요한계시록 11:15, 22:5).
둘째,
하루를 구분하는 때입니다.
‘새벽’이 기록돼 있습니다.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날뿐이었더라.” (여호수아 6:15)
‘저녁’도 기록돼 있습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5)
‘아침’도 기록돼 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가복음 1:35)
‘낮’ (느헤미야 8:3)과
‘밤중’ (출애굽기 12:29)도 기록돼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했습니다
(이사야서 60:22).
작은 자가 천을 이루는 ‘때’, 그 기회를 잘 포착해야 합니다.
‘절호의 기회’, 가장 효과적인 때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고
붙잡으면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영원한 세계에 들어갑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읽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세상을 다 팔아도 사할 수 없는
나의 원죄, 유전죄, 자범죄를 십자가 피로
다 사해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아무리 부자이고 세계 최고의 대학을 졸업했어도
예수 믿지 않으면 모두 헛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식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예수님을 믿으면 그분이 최고의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복 중의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때를 주고 기회를 주셨는데도
붙잡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이들은 내 백성,
내 기업(基業)이 아니구나” 하면서
신,구약에 기록된 저주와 형벌을 내리십니다.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돼 있지 않으면
누구든 유황불에 들어갑니다 (요한계시록 20:15).
무섭습니다.
“보수(報讐)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신명기 32:35)
때와 기회가 일치하는 순간
기회’는 인간이 마련하는 시간입니다.
양적 시간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채비하는 시간입니다.
여행을 앞둔 사람은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깁니다.
그런 준비의 시간, 일정한 시간,
구체적이고 상세한 시간이 기회입니다.
‘때’는 하나님께 속한 시간입니다.
질적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시간이니
그때를 붙잡아야 합니다.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만사에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고, 입학할 때가 있고,
공부를 마칠 때가 있습니다.
때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 속해 있고,
기회는 인간의 주권 아래 속해 있습니다.
‘때는 하나님,
기회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때’와 ‘기회’, ‘
하나님’과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음으로,
은혜를 받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와 ‘기회’가 일치될 때
역사가 창조되고 문화가 탄생합니다.
하나님이 때를 주셨는데도,
그 ‘때’를 기회로 삼지 않으면,
인간의 역사는 허사가 됩니다.
하나님이 때를 주지 않았는데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잔꾀를 부리고
돈 쓰며 오간다 해도 결국은 허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딱 붙잡고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여 이르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
(학개서 1:2)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이 어느 때인데
교회를 짓자고 하느냐?”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듣고 계시다가
“이 백성이 자기와 가족들을 위해서
좋은 집을 지을 때는 아낌없이 쓰더니
하나님의 집에는 비가 새고 문짝이 떨어져도
돈 내놓기 아까우니 이렇게 말하는구나.”하셨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건축하라고 주신 ‘때’를
‘기회’로 만들지 못하고 시간을 낭비하다가
백성 전체가 망하는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3년간 참으셨지만
그래도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애써 농사지은 모든 소출을 빼앗고
부녀자들을 겁탈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성전을 건축하라고 주신 때를 기회로 삼지 못하고
쓸데없는 세상 것에 정을 붙이고 그것을
기회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셨는데 (예레미야 5:24)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고
믿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비 올 때 됐으니까
오는 것이겠지’ 했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지 않으면
인간이 아무리 애써서 농사를 지어도
추수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고
‘주겠으면 주고 싫으면 그만 두쇼’
하는 식이니
하나님이 난처할 지경이었습니다.
다윗과 사울의 ‘때’ 10년이나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던 약자 다윗에게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엔게디 동굴에서 잠든 사울 왕과 마주친
다윗에게 부하들은 “기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내가 어떻게 죽이겠느냐.”라며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24:1-22, 26:1-25).
절호의 기회였지만
다윗은 자기 때가 아님을 알고
포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다윗이 기도할 때
응답하신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도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너무나 선한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위대하고 현명한 지도자였습니다.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렵게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얘기도 하지 않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역사의 흐름을
조급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10년을 쫓겨 다니면서도
‘하나님께서 나한테 무슨 뜻이 있겠지.’하면서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사울을 죽이면 내가 왕인데’ 하는
명예심에 도취돼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때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그때가 자기에게 주어졌을 때
그 때를 딱 붙잡고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때와
자기가 만든 기회가 일치할 때 새로운 역사가
탄생할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때가 임하면
내가 그것을 기회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인간에게는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라.’ 하실 때
은혜 받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 하실 때
미래의 일로 생각하지 말고
‘이 말씀 듣는 오늘 내가 회개해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회개하는 것이 바로 기회입니다.
몇 번 말씀을 들어도 회개하지 않고
어영부영하다가 회개할 기회조차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사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때를
집어던지고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내가 왕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국력을 소모하며 다윗만 쫓다가
블레셋에게 침공을 당해
세 아들과 한 날 한 시에 죽고 말았습니다.
작은 베냐민 지파 출신의 그를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으셨으면
그 기회를 잡았어야 할 텐데
내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적의 손에
사울을 전사시키는 것, 그것이 그의 때이고
기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좋은 날을 때로 삼고 기회로 삼아야 할 텐데
자기가 죽는 날을 때로 붙잡은 것입니다.
자기 자식들도 살릴 수 있었지만
그때를 놓치는 바람에 모두 죽는
기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엘리사 선지의 종 게하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사 선지가 문둥병을 고쳐준
앗수르의 군대장관 나아만을 따라 가서
엘리사 선지자 몰래 예물을 받아 챙겼다가
나아만의 문둥병이 그에게 옮겨가고 말았습니다.
은혜 받을 때지 물질을 받을 때가 아니었는데
게하시는 은혜 받기를 거부하고
물질을 탐냈습니다.
그렇게 챙겨온 물질은 입지도 써보지도 못하고
집안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때와 기회는 내가 믿으면 좋게 되고
믿지 못하면 거꾸로 나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이사야 49:8)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잠언 15:23)
때를 잘 만나면 기회의 문이 열립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고생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마음껏 쓰고 입지 못하지만
우리에게는 남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의(義)의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만들어진 세마포,
아름다운 에봇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과 비교하면
눈 깜박할 시간입니다.
번갯불 한번 치는 것 같은 세상에서
무엇을 취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 구원, 나의 때,
나의 은혜라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바울은 “내가 아무 것도 갖지 못했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했습니다.
말씀으로 우주만물이 창조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면
우주가 있고 하늘과 땅이 있고
늦은 비와 이른 비가 있다는 것을
믿고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때에 맞는 말은
우리를 변화로 인도합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잠언 15:23-24)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잠언 25:11)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로새서 3:1-2)
“그 집은 사망으로,
그 길은 음부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잠언 2:18-19)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립보서 3:20-21)
빌립보서 3장 20-21절 말씀은
죽지 않고 변화한다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사단의 어두운 세계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18, 골로새서 1:23).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여, 하나님의 때를 놓치지 않고
기회를 삼아서 그 나라 갈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해 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피난처,
나의 생명의 전부가 돼 주시고,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 돼 주소서.
나의 모든 시간과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오른 장중(掌中)에 있사오니
하나님께서 저를 붙잡아주소서.
그 나라 갈 때까지
날마다 시간마다
가정과 선물로 주신 아들딸,
나의 남편, 아내 잊어버리지 않고
늘 감사하고,
모든 생활에 만족하며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하다가
주의 품에 안기기를 소원합니다.”
하는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때를 붙잡고
생명의 길로 가십시오
성도 여러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병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원성을 가지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언약에 불순종하는 바람에
죄가 들어왔고 사망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영육간에 변화시켜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보서 3:20-21).
고린도전서 15장 51-54절에는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않음을 입고
이 죽을 것들이 죽지 않음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사망이 우리를 죽이러 왔다가
놀라서 도망갑니다.
이사야 25장에는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다고
예언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국 세계,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수십 년 목회하면서 수많은 성도들의
장사를 제 손으로 치렀습니다.
목자(牧者)는
부모와 마찬가지입니다.
친자식이 떠나는 것처럼
직접 염도 해줬습니다.
그때마다
산 사람으로 여기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었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26)
하나님의 때를 붙잡고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나가나 들어오나 복을 받고,
어디에 가도 감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믿음으로 보람 있고 힘차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휘선 박윤식 목사 설교-
(2011년 8월 24일 수요예배)
성경강해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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