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사는 이야기>
어머니와 형
고향집 본가 뒷산 언덕에 아카시아꽃
향기가 가득하다. 해마다 아카시아꽃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몸살을 앓듯
가슴을 앓으셨다.
어머니가 네번째 자식이자 셋째 아들을
잃었던 것도 아카시아꽃이 피어나던 이맘 때였다 한다.
나보다 두살 위였던 형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 아마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영양부족이 원인이었을 각기병을 앓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빛바랜 사진 한 장속에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매의 이목구비가 또렷한 아기로 남아있는 형은 아마 살아 남았으면 나보다 훨씬 키도 크고 잘 생긴 미남자가 되었을 것이다.
형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형을 대신해 셋째 아들이 되었다.
해방 후 젊어서부터 정치활동에 뛰어들어
지방의원부터 무려 대여섯번의 각종 선거를 치르며
집안 전체를 여러 번 들었다 놓았다 했던 아버지 덕분에
형이 태어나던 해는 무척이나 집안형편이 어려웠다 한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아버지가 여당후보에게
겨우 삼백여표차로 낙선한 후에 형이 태어났고,
내가 태어나고 난 후, 2개월여 후에 아버지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셨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도 야당후보로 막강한 여당후보와 선거를 치르느라 여전히 집안은 어려웠다지만 그래도 나는 자라면서 생각했다.
내가 형 몫의 영광과 복을 빼앗아 태어난 게 아닌가 하고…
내가 죽은 형에 대해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는 비교적 간단하다.
두세살 무렵, 영양부족이 원인이었을 각기병을 시름시름 앓았다는 것…
김치를 ‘은영’이라 불렀다는 것…
그리고, 김을 구워서 먹이려다 못 먹이고 죽었다는 것…
형이 앓으며 서서히 죽어갈 때, 어머니는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김을 구워서 먹여 볼 요량으로 시내에 나가서 김을 사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앓는 아들을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시다가 그만 김을 잃어버리셨다 한다.
어머니는 집에 와서야 김이 없어진 것을 아셨고, 생각해 보니
돌다리를 건너다 그만 강물에 김을 빠뜨린 것이었다고…
예나 지금이나 강릉시내는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남대천이라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옛날 ’60년대에는 아직 다리가 놓여지지 않아 시 외곽이었던 우리 동네에서 강릉시내로 다닐려면 그 강에 커다란 돌을 놓은 징검다리를 건너 다녀야 했었다.
어머니는 아픈 아들 생각에 서둘러 그 징검다리를 건너다
그만 그 강물에 김을 떠내려 보낸 것이다.
끝내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에게 김 한톳 구워주지 못했고, 어머니는 구운 김 대신에 형이 달라고 하는 ‘은영이’ 김치를 먹일 수 밖에 없었다 한다.
그렇게 내 바로 위의 형은 각기병으로 곱추처럼 몸이 오그라드는 병을 앓다
구운 김 한장 먹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옛날에는 어린 아기를 잃으면 장례도 치르지 않고 산에다 갖다 묻고는 하여 큰 고모부가 거적 같은 것에 싸서 지고가서 산 어디에다 묻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사망 날짜도,어디에다 묻었는지 오래전 큰 고모부도 돌아가셔서 지금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병든 형은 우리 집 마당위 하늘로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어머니 등에 업혀서 아버지가 온다고 웃으며 좋아 했다는데…
어린 아들이 김 한장 못 먹고 병들어 죽어가는 순간에도 서울에서 작은 마누라랑 자식낳고 살면서 고향집에 잘 내려와 보지도 않았던 아버지는 그 후 초선 국회의원 임기 때 예산을 따내어 번듯한 다리가 없었던 남대천 그 강물에 다리 동발을 세웠다.
물론, 그 다음 선거에 여당인 공화당 후보에게 석패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임기내에 그 다리를 완공하지는 못하였지만 하여튼 그 후에 강릉 시내와 우리 동네인 내곡동을 이어주는 다리는 세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강에 다리를 세울 때, 어머니가 당신의 죽어가는 어린 아들을 먹일 김을 사오다 그 강물에 빠뜨려버린 것을 알고 계셨을까…
그 다리가 평생 어머니의 가슴속 한과 눈물위에 서 있게 되리라는 걸 짐작이나 하셨을까…
그 후 다리를 건너 다니며 가끔 죽은 형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가 남대천 강물에 떠내려 보낸 김은 세월따라 흘러 가버리지 못하고 평생 그렇게 어머니의 가슴속에 걸려 있었다.
내 어린 날 채반 가득 들기름을 발라 김을 구우시거나 밥상에 구운 김이 놓여 있을 때 어쩌다 어머니는 그 때의 일을 담담하게 말씀하시곤 하셨고, 어린 나는 마음속 통곡도, 슬픔도 겉으로 일절 드러내지 않는
어머니의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일부러 김을 싫어했었다.
하지만, 이제 내 나이 오십이 넘어 어머니 연세 여든 여덟…
구십이 다 되어 가도록 지금도 가끔 죽은 형 말씀을 하실 때마다,
그 젊은 날 죽어가는 자식을 앞에 두고도 시어머니 앞에서 마음껏
한 번 울지 못하고 속으로 울음을 삭혀야 했던 어머니는 평생에 몇 번이나 애가 끊어졌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5월의 어버이날은 자식이 어버이를 생각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어버이가 자식을 생각하는 날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자식은 가끔 부모를 잊어도, 부모는 결코 자식을
잊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화사한 5월이다.
고향집 뒷산의 아카시아향은 올해도 진하다.
글/ 강릉 칸티우스
– 2016. 5. 8 –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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