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
1862년 서울 관지골(관훈동)에서 백정의 아들로 출생.
당시 칠천반(하류계층) – 포졸, 광대, 고리장, 무당, 기생, 갖바치, 백정등은 사람 취급도 못받는 천민이었다.
박성춘은 역시 백정의 딸과 결혼하여 봉출이라는 아들을 얻었는데
아들만큼은 백정신세를 면해줄려고
고심하던중에 사무엘 무어(모삼열,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곤당골 교회를 개척하고 곤당골예수교학당을 열자 아들 봉출을 보내 공부를 시켰다.
그 즈음에 전국을 휩쓴 콜레라에 박성춘이 걸려서 다 죽게되자 사무엘목사와 제중원 에비슨의사(고종황제 주치의)가 왕진을 다니면서 정성껏 치료해 그를 살렸다.
이는 당시에는 황제의 주치의가 백정을 치료한다는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이였다.
이 일을 계기로 박성춘은 곤당골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세례도 받었다.
곤당골 교회는 양반들이 주로 다니는 교회라서 양반들이 들고 일어나 박성춘을 교회에 못나오게 하고 집단으로 교회출석을 거부하면서 무어목사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무어목사는 하나님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면서 이를 거부하자
양반들이 따로나가서 예배당(홍문사골교회)을 세웠다.
이렇게 교회가 텅 비게되자 자신같은 백정들을 위해 애쓰는 무어목사에게 감동받아서 전도를 하기 사작하여 한양의 백정들과 천민들로 교회를 채우기 시작하여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한편 양반들이 따로나가 세운 교회는 양반들의 권위주으로 생명력이떨어져
3년 후에 다시 돌아와 현재의 ” 승동교회” 로 재 탄생하게 되었다.
그 후로 박성춘은 열심으로 섬겨 이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켜 세브란스를 졸업하고 1907년 조선 최초의 서양의사가 되었다, 바로 그가 박서양이다.
이 후에 박서양은 간도로 건너가 병원을 세워 활동하였고 만주에서는 대한국민회의 군의로도 활동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은 백정 박성춘에게 무어선교사를 보내서 역사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그의 믿음과 신앙으로 반상차별의 역사적인 전통과 관습을 끊고 사회개혁을 이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셨다.
< 한국기독교 성지순례선교회 회장 박경진장로의 글을 요약하였음.>
-박현근-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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