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산과 토끼에 관한 아버지의 이야기
소싯적
아버지는
붉은 산속에서
토끼를
키웠다
열 마리를
백 마리로
백 마리를
천 마리로
늘리겠어!
아버지는
산 아래를 향해
주먹을 흔들며
외쳐댔다
아버지는
헤밍웨이와
스타인벡을 읽으며
토끼를 키웠다
달무리 진 밤
희뜩한 별빛들로
어설픈 천점(天占)을
보고
손수 담근
산머루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마른
나뭇가지를
들어
허공에 불립문자를
휘갈기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쓸쓸한 얼굴로
말하곤 했다
토끼가
늘어날수록
고독과 광기도
늘어나더군
그러나
하루하루
아버지의 함성은
녹슬고 주먹은
금이 갔다
깨우침은
정처 없어지고
용기는
구부정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산림단속원들이
토끼농장에
들이닥쳤다
아버지는
산 아래 마을로
내달렸다
거기
어느 피륙 가게
경리였던
어여쁜
어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는
산에 두고 온
아름답고 사랑스런
토끼들을 떠올리며
울었다
어머니의
긴 손가락이
아버지의 봉두난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다른 한 손의
긴 손가락으로는
굴리던 주판알을
마저 튕겼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그때를 떠올리며
말하곤 했다
너희 어머니는
동정심과 현실감각을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처자였지
세월은 흐르고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토끼 같은
삼 남매가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독과 광기는
점차 잦아들었다
아버지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고자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아버지는 헤밍웨이와
스타인벡을 읽으며
우리 삼남매를
키웠다
아버지는
때로 쓰고
때로는 말했다
때로는
환멸에 대해서
때로는
치욕에 대해서
쓰고 말했다
마치
행복을 불러오는
유일한 방법이라도
되듯이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회한에 젖어
말하곤
했다
나는
전도양양한
토끼 농장주였어
공무원 시험도
단 한 번에 합격할 만큼
머리가 좋았다구
하지만
그 여우 같은
산림단속원들이
토끼를
무자비하게
살육했지
이제 나도
그놈들처럼
공무원이 된 거야
그놈의 돈 때문에
원수들과 한 무리가
된 거지!
언젠가는
붉은 산으로
돌아가고 말 거야
거기에는 어쩌면
살아남은
토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아버지는
붉은 산속에서
토끼를 키웠었다
아버지는
붉은 산 아래에서
우리 삼 남매를
키웠다
아버지의 마음속엔
많은 방랑들이
녹슨
왕관처럼
굴러다녔다
아버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었고
아무도
증오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태양이
영원히 뜨거운
상태로 죽어가듯이
죽어갔다
아버지는
몇 해 전 어느 여름날
돌아가셨다
나는
아버지의 붉은 산이
어디인지
모른다
아버지의 붉은 산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거기가 어디든
거기가 실제로
존재하든
아니든
아버지는
결국 붉은 산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토끼들이
살고 있을
붉은 산으로
고독과 광기가
아직도 뜨겁게
불타고 있을
그 붉은 산으로
-심보선-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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