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들이 가장 악용하는 성경 구절
요한복음 8:3-11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 이야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교회 중직자나 성직자의 범죄 사실이 들통나면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자주 악용되는 성경 구절이 있다. 요한복음 8장 3-11절에 나오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정죄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하셨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죄책감 눌린 이들은 모두 돌을 놓고 사라져 버린다. 홀로 남은 여인에게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11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여인을 향해 정죄의 돌을 들지 않고 돌려보낸다.
범죄자들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은 죄가 없느냐, 왜 나를 정죄하느냐”고 오히려 큰소리친다. 예수님도 정죄하지 않는데, “왜 내 죄를 갖고 왈가왈부냐”고 분통을 터트린다.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표면적으로 읽으면 정말 이들의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린다. 요한복음 8장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일까?
사본학적 의문점들
사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본문 자체가 오래된 사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신뢰성에 있어서 상당한 의문점을 남긴다. 대부분 고대 사본에는 없고 중세 사본에 등장한다.
1) 본문이 배치된 곳도 다양하다. 어떤 사본에는
누가복음 21:28 다음에 나오고, 어떤 사본에는
요한복음 7:44 혹은 7:36 혹은 21:25 이후에 나타나기도 한다.
2) 그래서 이렇게 다양한 곳에 등장하기 때문에 탁월한 복음주의 신약학자인 카슨(D. A. Carson)은 바로 이런 배치들이 “이의 진정성이 없음을 확증한다”라고까지 말한다.
3) 그래서 대부분의 성경 번역본들은
요한복음 7:53-8:11의 앞뒤에 꺽쇠로 표시해 두고 있다.
카슨은 그럼에도, 오래된 사본에 없다고 해서 예수님께 이런 일이 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덧붙인다.
4) 요한 사도는 자신의 복음서에 주님의 모든 행적을 포함시킬 수 없음을 솔직히 밝히고 있다(참고, 요 20:30-31). 사본학적인 면은 이 정도로 다루고 이제 본문을 살펴보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교묘한 음모
먼저 성경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음모 때문에 이 사건이 일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이들은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을 들이대면서 예수님께 답을 요청한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명하면, 예수님이 지금까지 죄인들과 세리들을 가까이 하시면서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의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더 심각한 함정은, 당시에는 로마 정권이 사형 집행권을 갖고 있어서 모세의 법대로 죽이라고 선언하면 예수님은 로마법을 위반하게 되어 처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5)반면에 모세의 법을 어기고 무조건 용서를 선포하게 되면 예수님은 모세의 법을 어기게 되어 무법한 자로 취급당할 수 있다.
6)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교묘하게 함정에 빠뜨리고자 이 여인을 끌고 온 것이다. 성경은 이들의 악한 동기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6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의 상황에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은 이들 모두가 돌을 놓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만들어 버렸다.
7)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에 나온 증인의 원칙에 호소하고 있는 말씀이다. 죄를 목격한 사람이 먼저 손을 들어 형을 집행하도록 율법은 규정하고 있다(신 13:9; 17:7).8)
율법이 정한 증인의 원칙에 예수님은 하나의 조건을 달고 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라는 조건이다. 이 조건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돌을 놓게 만들어 버렸다. 유대인들은 가장 경건한 사람조차도 죄 없는 사람이 없다는 공동된 가르침을 전한다.9) 돌을 든 무리였지만 이들의 양심에 호소할 때 아무도 감히 돌을 들고 있을 수 없었다.
왜 여인 홀로 잡혀 왔는가?
둘째로, 이 여인을 홀로 끌고 왔다는 점에서 이들의 음모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구약의 율법은 간음을 행한 경우, 두 사람을 모두 처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레 20:10; 신 22:23-24). 왜 여인만 끌고 왔는가? 함께 간음죄를 범한 남자는 어디에 갔는가?
율법에 두 사람이 함께 처형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는 들판에서 약혼한 처녀가 강간을 당했을 때다. 이때는 여자가 소리를 질러도 사람들이 도울 수 없기 때문에 남자만 처형된다(신 22:25-27). 그 외에는 간음죄를 범하면 반드시 두 사람이 함께 처형을 받는다. 구약성경에 간음죄를 지은 여자만 처형되도록 규정한 곳은 한 군데도 없다. 여인만 이렇게 끌려온 것 자체가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한 함정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이 여인만 불쌍한 희생양이 된 것을 잘 아시고 계셨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로 모세의 율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서 예수님께 율법대로 하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들의 악한 동기를 몰랐겠는가?
보편적인 죄인가 특정한 죄인가?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이 특정한 모함하는 죄에 개입되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 그가 먼저 돌로 치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10)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라는 말씀을 보편적으로 적용하게 되면, 어느 누구도 구약시대에 죄인을 처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구약시대의 어느 누가 죄 없다고 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어느 누가 구약시대에 모세의 율법대로 형을 집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이 특별한 경우의 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보편적으로 적용하여 “너는 죄가 없느냐 감히 나를 정죄하느냐”라고 큰소리쳐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은 두 가지 이유
첫째,
여기서 예수님이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예수님은 율법대로 죄인을 심판해서 지옥에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요 3:17).11)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반드시 죽을 수 있는 죄인이라도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을 주셨다. 이것이 주님 사역의 핵심이었다. 그래서 세리와 죄인들과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믿지 않는 바리새인 서기관들보다 이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선포하셨다(마 21:31-32).
둘째,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정죄의 돌을 들지 않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절)라고 경고하시고 보내신 것은 율법의 완성자로서 예수님 자신의 사역 때문이었다고 본다.
사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돌을 들 수 없지만, 유일하게 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다. 예수님 자신은 무죄하신 분이시요, 모세의 율법대로 처형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정죄의 돌을 들지 않은 것은 구약시대의 재판법(사회법)을 완성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옛 언약에 속한 의식법이나 재판법은 반드시 변혁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구약 제사 제도는 완성되었다. 예수님 자신이 희생 제물이 되셔서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양이나 염소를 잡아 바치는 속죄제나 속건제가 필요 없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를 받게 된다.
구약시대의 재판법(사회법)은 어떤가?
만약 예수님께서 오셔서 재판법의 완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구약의 재판법대로 교회는 간음죄 지은 남녀를 돌로 쳐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하드들의 피비린내 나는 처참한 처형 광경을 교회들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주님의 사역의 성격과도 역행하는 것이다.
모세의 법은 분명히 간음한 자들을 돌로 치라고 명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재판법(사회법)을 끝내시고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시작된 것을 이 사건에서 보여 주시고 있다.
간음죄 자체는 도덕법인 십계명이 금하고 있는 분명한 죄이다. 그러나 간음죄를 처형하는 방식은 구약시대의 재판법(사회법)에 속한 규정이다. 재판법은 더 이상 신약시대에 지속되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그래서 여인을 모세의 율법대로 처형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용서의 또 다른 측면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요한복음 8장은 범죄자 방어용으로 사용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복음 8장을 이해하게 될 때, 이 말씀은 범죄자들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도구로 결코 악용될 수 없다. 중직자나 성직자의 죄가 드러나게 되면 왜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이 회개를 촉구하는가? 죄를 인정하고 진정한 회개를 하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분명한 회개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는 게 아니겠는가?
범죄자들이 보여 주는 죄의 모습의 배후에 수년 혹은 수십 년의 죄악된 삶의 방식이 있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언론에 드러난 성추행범들은 대체로 수년간 이런 죄악된 삶의 방식을 지속했기 때문에 들통이 난 것이다. 많은 경우에 그렇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죄에 대해 단호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예수님이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을 잘 보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여인의 죄인 됨을 벌써 인정하고 하시는 말씀이다. 여인 자신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어디에도 “저는 간음죄를 짓지 않았다”는 여인의 항변을 들을 수 없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이제 목숨이 위태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길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자비를 베푸셨지만 결코 그녀의 죄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 이 점을 범죄자들은 놓치고 있는가?
진정으로 주님의 은혜와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자신의 죄악된 삶을 청산하도록 주님은 요청하고 있다. 우리가 다 부족하여 변화의 속도는 느릴 수 있다. 주님은 반드시 변화를 해야 한다고 요청하시고 있다.
주님은 죄악된 삶도 즐기면서 주님도 따르는 삶을 결코 원치 않는다.
어느 창녀가 주님을 믿은 이후에 창녀 생활하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어느 도둑이 주님을 믿은 이후에 그 죄를 즐기면서 주님을 따르고 있는가?
주님을 만난 세리 삭개오는 주님이 요청하기도 전에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주님께 고백했다(눅19:8).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옛 삶을 모두 청산해 버렸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중직자가 범죄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믿는 자라고 하면서, 아니 중직자라고 하면서, 아니 성직자라고 하면서 죄를 짓다가 들통이 난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한 죄를 지은 경우에 성경의 가이드는 분명하다.
고린도교회에 계모와 간음한 자가 있는데 교회에서 이들을 징계하지 않았다. 바울은 교회를 향하여 분명하게 책망한다.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고전 5:2). 누룩이 떡덩이 전체를 변하게 만들 듯이, 이런 범죄자를 그냥 두면 공동체를 변질시키기 때문에 반드시 공동체 밖으로 내쫓으라고 명하고 있다(고전 5:6-8).
영원히 교제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편으로 공동체를 죄로부터 보호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진짜 그 죄인을 위한 길이요, 교회 공동체를 위한 길이다. 그래야 개인도 살고 교회도 살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 모든 문제는 중한 죄를 지은 사람들을 합당하게 징계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세습이라는 누룩 덩어리가 들어오자 이제는 대형 교회만 세습하는 게 아니라 너도나도 앞다투어 세습한다. 세습으로 고통당하는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회개치 않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이 모함에 의해 잡혀 온 여인을 대한 태도와 예수님이 당시에 가장 신앙이 좋다고 평가되는 종교 지도자들을 대한 태도는 180%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주님이 보인 죄에 대한 태도에는 일관성이 있다. 마태복음 23장을 읽어 보라.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신가?
예수님은 회개치 않는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죄에 대해서는 낱낱이 폭로하고 계신다.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신다.
랍비와 지도자라는 명예욕에 찌든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신다.
천국문을 막고 있는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신다.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교인들을 오도하는 이들을 ‘맹인’이라고 폭로하신다.
율법의 중요한 것은 뒷전에 두고 율법 규정에도 없는 사소한
십일조를 따지는 이들의 앞뒤가 뒤바뀐 위선적인 신앙 행태를 폭로하신다.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찬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신다.
이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폭로하신다.
선지자와 의인들을 핍박하는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신다.
마지막에는 이들을 향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33절)라고 엄중한 심판을 선언하신다. 이들의 죄는 양심적인 의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엄청난 죄들이다.
이뿐인가?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철저히 파헤치고 면박을 주고 죄악상을 폭로하셨다.
예수님은 회개치 않는 범죄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상을 그냥 덮고만 지나가신 분이 아니다.
철저히 드러내어 회개를 촉구하신 분이다.
하나님나라는 회개 없이는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례요한도 주님도 맨 처음 외친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4:17)였다.
당연히 회개해야 할 사람이 회개치 않을 때,
예수님은 분노하신다(참고, 눅13:3-5; 마23장).
마땅히 회개하고 돌아서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회개치 않을 때, 오늘도 사람들은 분노한다.
아니,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더욱 분노하신다(시 7:11).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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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강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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