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마음의 자유 추구한 참詩人 구용(丘庸) 선생 영전에
어디 유족과 후학들만이 견뎌야할 슬픈 결핍감이겠습니까.
구용 선생 고택의 서너평 남짓한 뜨락 한가운데서 선생과 오랜 동안 친교하던 은행나무도 이제부턴 이 혹독한 결핍을 함께 견뎌야 할 것입니다. 선생께서 기거하시던 몇 뼘 안되는 사랑도 이젠 바깥 주인의 부재를 한없는 적막감으로 버텨내야할 테지요.
이 속절없는 결핍의 시간을 아시는지, 은행나무 가지엔 세모의 눈꽃들이 그저 속절없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한국 문단도 또 한분의 스승을 잃은 결핍감을 오랜 동안 삭혀야 할 것입니다.
아둔한 저로선 선생의 동서양의 사상과 문예에 대한 박학과 한학의 통달에 대해 감히 가늠해볼 용기조차 나질 않습니다. 다만 기억합니다. 문학을 심히 앓던 더 젊었던 날 언젠가 헌책방에서 우연히 선생의 시집 ‘시(詩)’를 만나 그 매우 지적이면서도 자유자재한 시 정신에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그 불가사의한 시 세계에 도무지 출입할 수 없어 당혹해했던 때를.
그리고 세월은 흘러 70, 80년대의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 계급적 민족 문학과 서구적 자유주의 문학 사이의 오랜 대립과 싸움이 차츰 잦아들 무렵, 대신 한국 문단이 미문의 추문과 명망의 위선과 욕망의 난전(亂廛)으로 변질된 90년대말, 주독(酒毒)으로 피폐해진 심신으로 병석(病席)의 구용 선생을 처음 찾아뵙던 날, 제 문학에 대한 치욕과 혐오가 한낱 어리광과 어리석음에 불과함을 벽력처럼 깨달아야했습니다.
그 날 선생께선 선생의 주식(主食)인 포천 막걸리잔을 앞에 두시곤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의 시 여러 편을 낮지만 저력있는 목소리로 외시다간 한동안을 우셨고 또 우시다간 다시 외시길 되풀이하셨으며 간간히 ‘도덕경(道德經)’ 몇 귀절과 서양의 현대시인들을 아무 형식없이 그러나 단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전 그때 선생의 오랜 은거(隱居)와 고독이 얼마나 형형(炯炯)한 선비 정신에서 나온 것인지, 인간에 대해 신뢰와 사랑이 얼마나 깊으신지 어렴풋하나마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른 지금, 저는 그 자체로 우리 현대 예술사를 수놓은 저 많은 장인들의 거대한 군상화(群像 )인 ‘구용일기(丘庸日記)’에서 지난하고 궁핍한 시대를 살아온 선비적 문인이셨던 ‘스승’의 인자한 초상화를 다시 만납니다.
평론가 故(고) 김현 선생께선 “김구용의 노력은 ‘돌 속에서도 하늘을 여는’ 참된 노래를 얻었다”고 선생의 시 세계를 적확하게 평한 바 있습니다. “돌 속에서도 하늘을 열기” 위해 선생께선 얼마나 철저히 자기(自己)와 언어(言語)에 대한 부정(否定)의 정신을 실천해야했을지요?
마음의 근원적 자유를 추구하지 않으면 선생의 시를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언어의 낡고 속된 의미를 초월하는 ‘삼매경(三昧境)의 시’가 바로 ‘구용 시’의 본바탕인 까닭이며 따라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에 이르려는 마음 공부가 선생의 시의 비밀을 푸는 열쇠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이리하여 돌은 노래한다 (…)대답은 반문하고/물음은 공간이니/말씀은 썩지 않는다”(시 ‘풍미(風味)’ 중)는 까다로운 시귀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난해(難解)의 이기적 유희가 아니라 난해(難解)의 궁극적 자유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구용 시’는 “돌 속에서도 하늘을 여는” 높고도 심오한 경지에 도달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는 분명 한국시의 경이로운 체험이기도 합니다.
절친한 동무이셨던 시인 박용래 선생, 천상병 선생… 지금 그 분들 곁으로 구용 선생께서 떠나십니다. 이제 살아남은 한국문단은 이 크나큰 결핍과 부재의 자리를 어떻게 메울 수 있을런지요?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임우기-
(문학평론가)
(동아일보. 입력 2001-12-30 17:53:00)
좋은글 감사합니다
http://www.loaloachristiannetwork.com/
<Photo from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