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 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확인란에
내 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넌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꽉 걸어 잠그고는
홀짝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 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 가짓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받는다
어른이
아이들이 안하는
반찬 투정 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대도 열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또 열받는다
죽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받을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받지 않는다
열받아도
열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받게 하는 것이다
-글/안도현-
(시집명: 외롭고 높고 쓸쓸한)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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