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살다보면

살다보면
나이에 상관없이
아픔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옵니다

괜찮다고
괜찮으리라고
괜찮을거라고 다짐해도

누군가
‘정말 괜찮니?’
라는 한마디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엄마일수도
사랑하는 사람일수도
친구일수도 있습니다

눈물을
쏟게 만든다는 것은

위로를 받고
의지하고 싶을 만큼
힘들다는 말입니다

지치고 힘들때
곁에 힘이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괜찮은 위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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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ry Them Forever

Carry Them Forever

The LORD is
the strength of
his people,
a fortress of salvation
for his anointed one.

Save your people
and bless your inheritance;
be their shepherd
and carry them forever.
Psalm 28: 8-9

여호와는
저희의 힘이시요
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산성이시로다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저희의 목자가 되사
영원토록 드십소서
시편 28: 8-9

***

LL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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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이정하

슬픈 사랑아
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네
내 가진 것은 빈손뿐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소유가 된다 하더라도
결코 그대 하나
가진 것만 못한데

슬픈 사랑아
내 모든 것
그대에게 주었으므로
더 이상 그대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네

주면 줄수록
더욱 넉넉해지는
이 그리움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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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시인 이정하의 눈물겨운 참회록

베스트셀러 시인 이정하의 눈물겨운 참회록

 

1990년대에 사랑을 했던 사람치고 이정하 시인의 시집 한 번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87년 문단에 데뷔한 그는 대표작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를 비롯 ‘한 사람을 사랑했네’,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 등 줄곧 사랑에 관한 글을 써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로 사랑을 고백하고 실연의 아픔을 달랬다.

잘나가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그는 한동안 활동이 뜸했다. 매년 새로운 히트 작품을 내놓던 1990년대와는 달리 2000년대 들어서는 이렇다 할 신작이 없었다. 그런 그가 요 근래 다시 활발한 집필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2007년에는 생애 첫 소설을, 지난해는 에세이를 선보였다. 최근에는 또 한 편의 신작 에세이 『사랑이 켜지다 로그인』을 펴냈다. 이 작품은 인터넷이란 가상공간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담아냈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사랑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시대가 흐르면서 사랑의 소통 방식 또한 많이 변했어요. 예전에는 ‘사랑’은 곧 ‘기다림’이었잖아요. 고백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고백이 담긴 편지를 쓰면서 또 고민하고, 편지를 다 써놓고도 줄까 말까 생각이 많았죠. 그런데 요즘은 문자 메시지 한 통, 메신저 대화로도 고백을 하더라고요. 시대에 맞게 변해 가는 사랑법이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론 가볍게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해요.”

베스트셀러 작가 되니 자만심 생기더라

 

그는 사실 온라인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익숙치 않다. 가끔 이메일을 주고받는 정도일 뿐, 컴퓨터는 주로 글을 쓸 때만 사용한다. 그럼에도 인터넷 사랑을 소재로 작품을 쓴 유는 그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을 해본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고 사랑에 대해 100% 안다고 할 순 없지만 비교적 다른 작가보다는 사랑에 대해좀 많이 아는 편”이라 자신했다.

실제로 그는 사랑에 대해 관심이 많다. 책, 영화, 라디오, 주변 사람 등을 통해 사랑 이야기를 접한다. 그에게 구구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보내오는 독자도 많다. 그는 눈만 뜨면 사랑을 하고 헤어지는 생활이 반복되는 셈이다.

“제가 쓰는 사랑 이야기는 모두 아파요. 뜨겁게 사랑하고 헤어진 이야기죠. 저는 제 글을 읽는 독자들이 가슴 절절한 이야기를 통해 ‘난 그래도 저만큼 아프진 않으니 다행이야’라고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사랑 이야기로 돈은 많이 벌었지만 마음은 점점 가난해져 갔다고 지난날을 고백했다. 나름대로 쓰고 싶은 글도 있고, 또 마음이 내킬 때 글을 쓰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출판사와의 계약도 지켜야 하고, 그 무렵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도 생겼다. 결국 그는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 2000년도에 출판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출판사를 차리고 보니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원고를 읽고 고치는 게 일이 되다 보니 정작 자신의 원고를 쓸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글도 잘 안 써지고 슬럼프까지 겪어야 했다.

게다가 야심차게 문을 연 출판사도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출판도 결국 장사였다. 책을 내는 것과 만든 책을 파는 것은 달랐다. 하지만 상황이 안 좋아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직원 수를 늘리고 책을 더 많이 만드는 등 공격적으로 경영을 해나갔다. 그럴수록 상황은 악화되어 갔고 더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결국 그는 돈을 구하기 위해 이것저것 손을 대기 시작했다. 도박도 그중 하나였다. 우연한 기회에 도박을 하게 된 그는 처음에는 돈을 땄다.그 재미에 한두 번 더 하다가 자꾸 돈을 잃자 그 후로는 무서운 속도로 도박에 빠져들게 됐다. 도박의 특성상 한번 빠져들면 대부분 중독에까지 이르게 마련.

그 역시 자신도 모르게 도박에 점점 빠져들고 말았다. 한번은 하루에 2천~3천만원씩 따서 열흘에 3억원을 모은 적이 있단다. 그때 그는 2억원은 급한 빚을 갚고 1억원을 가지고 다시 도박장으로 향했다. ‘한 번만 더 이만큼만 따자. 그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채 두 시간도 못 되어 가진 돈을 다 잃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사실 그동안 출판사가 어렵긴 했어도 그럭저럭 이겨낼 수 있었는데, 그가 도박을 접하면서 급격히 더 어려워졌다.

“도박장은 굉장히 무서운 곳이에요. 요지경 속입니다. 도박하는 사람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기 위해 도박장 안에 창문과 거울, 시계를 없애버립니다. 저같은 아마추어가 도박장에서 승부를 내려 하니 되겠어요? 전 제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도박을 하겠다고 하면 쇠사슬로 묶어서라도 못 가게 할 거예요.”

2003년 무렵에는 더 이상 손을 쓰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고, 그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전국을 떠돌았다. 당시 프랑스에서 지내고 있던 아내와 아이들, 그와 함께 지내던 어머니와도 연락을 끊고 2년 가까이 혼자 방황했다. 밥 사 먹을 돈도, 잘 곳도 없이 어렵게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가족들은 외국에 있지, 출판사는 부도났지, 돈은 필요하지 참 힘든 시기였어요. 나중에는 빌릴 만한 데서는 돈을 다 빌렸는데도 감당이 안 되더라고요. 힘들게 지내고 있는 저를 언론사에서 많이 찾아왔었죠. 당시 사회적 핫이슈가 기러기 아빠였는데, 잘나가는 시인이 기러기 아빠인데다 금전적 어려움까지 겪고 있으니까 다큐멘터리로 꾸미기 딱 좋잖아요. 사람들 피해 다니느라 고생했어요.”

결국 설립한 지 4~5년 만에 출판사 문을 닫고 말았다. 그동안 그가 쌓아놓은 모든 것이 한순간에 다 날아갔다. 그렇게 몇 년간 그는 깊은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온몸의 힘이 다 빠지고서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땐 자신이 왜 정신을 차렸을까 싶을 정도로 상황이 너무 참담했다고.

그런 그가 절망 속에서 헤어나기 시작한 때는 2005년 무렵이다. 사람을 피해 숨어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만난 한 친구 덕분이었다. 길을 지나다가 그를 발견한 친구가 달려와 그를 와락 끌어안았는데, 당시 그는 반가움보단 창피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단다. 그때 그 친구는 다 안다는 듯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일어나 임마, 어서 걸어가야지’라는 말을 해줬다. 그는 친구의 말을 듣는 순간 ‘그래 맞아. 내가 일어나서 걸어가면 되지’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 뒤로 그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토록 안 써지던 글이 술술 써지는 것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하고 ‘이게 나의 길이구나’ 깨달았다.

방황과 깨달음 담은 자전적 소설 집필 중

누구나 감기에 걸린다. 감기에 걸린 당시에는 열이 나고 몸이 아프지만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좀 독한 감기를 앓았을 뿐이다. 주위 사람들은 방황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따뜻하게 격려해 줬다.

“아직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살면서 방황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를 경험해 보는 것이니까요. 다만 저의 방황으로 가족을 힘들게 했던 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2년 전 『나비지뢰』를 탈고할 때쯤 눈이 안 보인다던 어머니는 요즘도 몸이 좋지 않으세요. 그 눈에 숱한 눈물을 흘리게 했으니 저도 참 못난 아들입니다.”

문단에 데뷔한 지 어느덧 21년. 그동안 그에게 문학은 닳은 신발 같은 것이었다. 버리려고해도 버릴 수 없이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결국 글 쓰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게 됐다.

그는 요즘도 사랑에 관련된 소설을 쓰고 있다. 이번에는 사랑을 거래하는 이야기다. 첫 장편 소설이 생각만큼 팔리지 않는 걸 보며 사랑은 쉽게, 유치하게 써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단다. 중년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랑과 그 이면에 숨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담아 올겨울 즈음 발간할 계획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재미있지만 처참했던 경험이 많아요. 그런 일들을 겪으며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사실 사랑 소설 말고도 또 준비하고 있는 책이 있어요. ‘비겁’이라는 연작시인데 저의 비겁했던 일들을 시로 고백하려 해요. 다른 사람들도 저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비겁했던 순간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는 한때 팍팍한 현실을 도피했던 비겁한 가장이자 아들이었다. 또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아예 출판계를 떠나려 했던 비겁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그는 프랑스에 떨어져 사는 딸이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다며 “아빠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한 딸을 위해서라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어요”라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순박한 시인은 세상을 겪으며 더욱 단단해져 가고 있다.

 

-취재/윤혜진 기자 –
출처: Korea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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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ighty Hand


with
a mighty hand
and outstretched arm;

His love
endures forever.
Psalm 136: 12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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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오는 밤

 

돌아와 오는 밤

-윤동주-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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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윤동주의 시를 읽다

광복절, 윤동주의 시를 읽다

[변방의 사색] 윤동주의 <별 헤는 밤>

1.

일본에서 태어나 열네 살 때 조선으로 건너온 아버지는 광복절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친구들과 하루 종일 술을 드시며 노셨다. 한 해도 거르지 않으셨다. 불콰해진 얼굴로 일본 노래도 부르고, 때로 목소리 높여 싸우기도 하셨다.

내 할아버지는 해방을 얼마 앞두고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가산을 정리해서 뒤늦게 나오시다 미군 폭격으로 현해탄에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우리는 할아버지 무덤이 없다. 열네 살 나이에 할머니를 도와 졸지에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아버지는 서툰 한국말로 구두닦이에 날품팔이에 기약 없는 노동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나뭇짐 가득 쌓인 지게를 받쳐 두고 부산으로 향하는 경부선 철로를 바라보며 눈물바람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광복절 아침에 서가에서 윤동주 시집을 꺼내어든다.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옥사한 윤동주. 그의 대표작인 <서시>나 <별 헤는 밤>은 한국인들에게’시란 이런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준, 한국어로 형상화된 가장 아름다운 한 정신의 풍경화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꼭 학교 교육의 덕택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짧은 생애의 모든 기간이 일제 강점기에 걸쳐 있다는 사실, 그 순결한 넋이 극한에 다다른 제국주의자들의 광기에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마음 아프다.

한 번도 손들어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무서운 시간> 중에서

꼭 그렇게 자신이 죽을 것을 예감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그가 이런 비애만으로 시를 쓴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번에 읽어보니, 그가 스무 살 전후로 가톨릭 잡지에 발표했다는 그의 동시가 참 좋다. 어린아이 같은 순정한 마음이 느껴진다. 이것 또한 시인의 마음이다.

 

가을 지난 마당은 하이얀 종이
참새들이 글씨를 공부하지요

째액째액 입으로 받아 읽으며
두 발로는 글씨를 연습하지요

하루 종일 글씨를 공부하여도
짹자 한 자밖에는 더 못 쓰는 걸 ― <참새>

웃음도 나오고 마음이 훈훈해진다. 타작과 탈곡 마당에 쫑쫑대는 참새들을 바라보는 소년 윤동주가 눈에 보이는 것 같다. 비록 엄격한 기독교적 분위기였으나, 이런 엄혹한 시절에도 이런 소년의 마음이 가능했던 것도 그가 북간도 명동촌 한인 자치부락이라는 자유의 공기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무렵 남긴 시에는 이런 것도 있다.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굴은
누나의 얼굴
얼굴이 숙어들어
집으로 온다 ― <해바라기>

나중에 민중가요로도 작곡된 동시다. 그 당대의 노동현실이 인상적으로 음각되어 있다. 깊은 울림이 있다. 산업화와 착취를 바라보는 한 순결한 정신이 그려낸 인상화이다. 소년 시절, 그의 제일의 벗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그러하였듯 윤동주가 해방 이후에 살아남았더라면 또한 우리 민족사의 큰 정신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2.

 

▲ <별 헤는 밤>(윤동주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1938년경, 윤동주는 연희전문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타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반자치의 자유를 누리던 북간도에서 이제 식민지 현실의 중심으로 진입한 것이다. 이 시점으로부터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1년여 만에 사상범으로 체포되는 시점까지의 4년여 동안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이십여 편의 시들을 남기게 된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이옵기에―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보아야 방안과 같이 어두워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던 길이 그대로 비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루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 <돌아와 오는 밤>

자취하던 대학생 시절, 나는 이 시를 참 좋아했다. 맨 마지막 구절의 둔사(遁辭)같은, ‘사상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간다’는 구절이 이 탁월한 시를 망쳐버린 것만 같아 그냥 칼로 도려내고만 싶었다. 사상이 능금처럼 익든 말든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맘은 그랬다.

나 또한 타향에서 홀로 지내던 때였다. 알 수 없는 우울과 슬픔을 안고 살아가던 때, 어쨌든 내겐 이 시가 내 온몸으로 다가왔다. 피로한 하루어치의 삶에 지쳐 내 방에 들어와 털썩 무너지듯 주저앉을 때에도,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에 울분을 씻을 길이 없을 때에도. 긴 비가 오는 날, 비속으로 젖어가는 세상을 보면서 이렇게 세상이 스르르 잠들어 가라앉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의 죄로부터 피해있을 곳은 없었다. 다만, 땀 흘려 노동하는 삶이라면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고, 죄짓는 삶일지언정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윤동주도 그러했으리라.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 <또 태초의 아침> 중에서

3.

윤동주는 내성의 시인만은 아니었다. 그의 우울과 좌절은 단순한 포즈만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시가 있다.

영하로 손가락질할 수돌네 방처럼 치운 겨울보다
해바라기 만발할 팔월 교정이 이상(理想) 곺소이다.
피끓을 그날이―

어제는 막 소낙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좋은 날세올시다.
동저고리 바람에 언덕으로, 숲으로 하시구려―
이렇게 가만가만 혼자서 귓속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나는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는 아마도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역사 같은 포지션을 지켜야 봅니다. <한난계(寒暖計)>

한난계는 온도계를 말한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진실한 세기의 계절을 따라’, 그리고 ‘하늘만 보이는 울타리 안을 뛰쳐’ 나아가 피 끓을 그날에는 목 놓아 외치고 싶었던 것이 그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하긴, 윤동주가 끝내 일제의 감옥에서 살아났더라도 그의 그다음 삶은 또한 어찌 되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가 해방 공간에 숨기어진 흉포한 발톱을 피해 갈 수 있었을 것인지도 장담할 수 없다.

막노동과 날품팔이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던 우리 아버지는 해방 후 조선 땅 밀양에서 살아남고자 우익에 줄을 섰다. 청년단원이 되어 좌익을 소탕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전쟁이 났다. 그러나 징병은 피해야 했다. 여동생과 어머니를 보살필 사람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징병을 피할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 밤을 틈타 부산까지 걸어가 군수공장에 겨우 일자리를 얻었다. 거기서 끔찍한 노역에 시달리다 사고를 겪었고, 작은 장애를 얻었다. 윤동주처럼 죽지는 않았지만, 살아남은 우리 아버지에게는 윤동주가 그리워했던 ‘역사 같은 포지션’은 없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노동, 노동, 빵장수와 날품팔이, 드난살이였을 따름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주 술을 드시고 회한에 젖어 우셨다. 아버지의 광복과 그 이후의 나날을 생각하면 나도 슬프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 <팔복>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한 날카로운 도발이다. 그러나 그에게 이 독신(瀆神)의 외침은 이 슬픈 역사에 대한 자신의 눈물이며, 방관하는 신에 대한 절절한 항의에 다름 아닐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먹고살기 위해 이렇게 떠돌 때에도, 죽을 줄 알면서도 역사의 제단에 제 몸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흘러나는 피를
어두워져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 중에서

1942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가을에는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학한다. 수시로 경찰이 하숙방을 뒤지고 끽하면 잡아 가두고, 고문하던 시절이다. 모두가 숨죽였고, 굶주림을 껴안고 살아야 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구체적인 행동의 물증이 없더라도 조선인들을 탄압하는 데에 흔히 사용되었던 ‘사상불온’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조국 광복을 불과 6개월여 앞두고 옥사했다. 그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그의 죽음이 또한 그 시대의 십자가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동주도, 그리고 우리 아버지도 모두 불행했다. 불행한 시대에 살았던 이들이 치러야 했던 역사의 죗값이었다.

4.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또 다른 고향> 중에서

어둠을 짖는 개의 울음소리에 쫓기우는 양심. 이 양심은 지금 이 땅에 남아 있는가.

윤동주가 죽고 난 뒤, 66년의 역사란 또한 백골 같은 나날들이었다. 광복절인 오늘도 어디에선가는 성조기와 이승만과 박정희의 초상을 들고 검은색 라이방을 쓴 한 무리의 인간들이 운집해 있을 것이다.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을 위로하고 연대하기 위해 부산까지 내려간 이들을 뒤쫓아가 후려치고 멱살을 쥐던 깡패 같은 인간들, 그들의 완력과 우격다짐들이 진실과 양심을 주장(朱杖)질 했던 66년이었다.

윤동주의 시들은 또한 자기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어둠과 대결하려 했던 한 순결한 영혼의 기록으로 남았다. 그리하여 그가 그렸던 맑고 깊은 서정은 이 캄캄한 시절에도 별처럼 빛난다. 수십 년의 세월을 격한 지금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시대의 어둠을 슬퍼하는, 그리고 순수를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의 시심(詩心) 속에 남을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윤동주가 그 숨 막히는 시대에도 홀로 노트에 시를 끼적여 남겨주었다는 사실이.

소년 윤동주, 역사의 격랑에 올라타지 않았더라면, 결국 이 마음으로 살았을 아름다운 소년. 그의 사랑하는 순이, 황홀한 소년의 마음을 생각하며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로, 우익 깡패들의 패악질로 도배된 오늘 2011년 광복절을 넘어간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 <소년>

 

-이계삼 밀성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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