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택
헝가리 태생의
로버트 카파(Robert Capa)는
세계적인 종군 사진 기자다.일상 속의 보석같은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과 함께 세계적인 보도 사진 작가 그룹 매그넘
(Magnum Photos)을 이끌면서 사람들에게
이미지로 포착된 우리 삶의 풍경이자
기록물인사진의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영향력을 천명했 던 인물이다.
카파는 그가 태어난
1913년부터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아 사망한 1954년, 그의 생애 마지
막 순간까지 스페인 내전, 중일 전쟁, 2차 세계
대전 등 5개의 커다란 전쟁에 직접 참여해 사진
을 찍었다.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카메라
를 들고 전장에 뛰어든 사람은 사실상 그가 처음
이다.그에 앞서 카메라를 들고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있었지만 대개 전쟁을 홍보하거나
선전할 목적으로 사진을 찍은 경우였다.
1936년 세계적인 사진 잡지 라이프(LIFE) 의
창간호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Spanish
Loyalist at the Instant of Death)이라는 제목
을 단 카파의 사진 하나가 실리게 된다.병사 한
명이 참호에서 적진을 향해 달려나가다가 적의
총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는 아주 극적인 장면
이 담겨져 있다.이 사진으로 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게 된다.이후에
그의 이름을 딴 카파이즘(Capaism)이란 신조
어도 만들어진다.전쟁 지역 깊숙이 들어가 총탄
이 빗발치는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전쟁의 참상
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투철한 기자 정신을 뜻
한다.공교롭게 카파와 그의 연인 게르타 타로
(Gerda Taro)는 둘다 위험 지역에 사진을 찍으
러 갔다가 각각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다.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모두가 칭송한 그들의 보도 정신
카파이즘을 실천한 셈이다.
하지만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사진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을 두고 여러 논란이
있었다. 그가 촬영한 것이 아니라 그의 동료이자
연인이었던 타로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부터, 사
진 속 병사의 몸에 아무런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볼 때 그냥 넘어지는 사진이라는 이야기도 있었
다.하지만 정작 카파는 이 논란에 대해 생전에
그 어떤 해명도 내놓은 적이 없다.하지만 그가
죽고 그의 지인들의 입을 통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진다.
카파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그들의 말을 옮기면 사진을 찍을 당시는
전쟁이 교착 상태여서 당시
에 알려진 것처럼 총탄이 빗발치는 격전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병사의 죽음엔 어느정
도 카파의 책임도 있어 카파가 생전에 그 죄책감
으로 힘들어했다고 한다.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그 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지루한 시간에 카파가
카메라를 들고 그 병사를 장난삼아 참호 밖으로
불러냈는데 마침 적의 총탄이 날아와 비극적
상황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다.찰라의 순간을 담
았는데도 촛점과 앵글이 안정적인 것을 보면
그럴만도 하지만 그는 사실주의를 내세워 목숨
까지 잃은 카파가 아닌가.여전히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생생한 사진을 찍기위한 카파의 지나친
열정 때문에 발생한 비극일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추측이 있다.
나도 서너 번 방송 카메라를 들고
위험 지역을 방문했었다.
카메라에 담아야 할 대상과 촬영
목적이 정해지면 그때부터는 내게도 촬영 본능
이란 것이 작동한다.속된 말로 나도 ‘그분’이
오시는 경험을 한다.
칠레와 아이티의 지진 현장을
찾아가 피해 상황을 카메라에 담을 때였다.
사고 현장은 밤낮으로 여진 때문에 흔들렸다.
현장 사람들은 공포감에 그 때마다
활동을 중단했지만
카메라를 든 나는 그 공포를 카메라에 담아야
했기에 언제나 지진의 공포 가까이로 더 다가서
야 했다.무너진 건물과 부서져 기운 도로 깊숙
이 들어갔고 더러 희생자의 사체를 카메라에
담아내기도 했다.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이
겠지만 카메라로 그 피해 상황을 기록해야 하는
내 입장에선 언제나 그 위험에 다가서는 것이
최선이었다.그러다 종종 주변에서 나를 뜯어
말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내가 너무 촬영
에 집중한 나머지 위험한 상황을 맞이해서다.
내가 알기로는 많은 종군 기자들과 재난 지역
촬영 기자들이 그렇게 촬영을 하다가 다치거
나 목숨을 잃는다. 그렇게 누군가 나를 뜯어
말려 제 정신을 차리면 기진맥진 제 자리에
주저앉는 경험도 여러번이다.극한 상황에서의
촬영은 그렇듯 몸과 마음을 다해 몰입해야 하
기에 위험에 처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재난
지역 촬영이 이 정도이니 총탄이 빗발치고 여기
저기서 폭탄이 터지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
는 전쟁터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난 4월 15일 시리아 알레포 지역에서 피난
민을 태우고 이동하던 버스가 폭탄 테러를 당
하는 참사가 발생했다.마침 이 버스에 타고 있
었던 어린이들의 피해가 컸다.당시 알레포
지역의 전황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던 알카테
르 하바크라는 사회 운동가 출신의 종군 사진
기자는 테러 발생 직후에 카메라로 현장을 담는
특종의 기회를 포기하고 바로 피해 현장의 어린
이를 안고 현장 인근의 구급차를 향해 뛰었다.
그가 상처가 깊은 어린이를 안고 뛰는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면서 난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
져들었다.아이를 안고 달리는 그의 오른 손엔
카메라가 쥐어져 있는데 그것은 그가 이성적인
상태에서 판단하고 행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도 같은 상황에서 그처럼 행동할 수 있었을
까 그리고 로버트 카파는 촬영을 포기하고 어린
이를 안고 뛴 하바크의 행동에 대해 어떤 생각
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테러 현장
에서 카파이즘을 실천했던 다른 사진 기자들에
의해 하바크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졌고 그 사진
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시리아 내전의 참혹한
상황을 알게 되었다.
카파는 생전에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전쟁에서는 누군가를 증오하거나 사랑해야
한다.그 어떤 입장도 아니라면
그 상황을 견딜 수 없다”
나는 테러 현장 특종을 포기하고 대신 부상을
입은 어린이를 안고 구급차로 달려간 종군 사진
기자 하바크는 인류애를 의미하는 ‘사랑’의
입장에 선 것이고 처절히 눈물 흘리며 크게 다친
아이를 안고 달리는 하바크를 촬영한 다른
사진 기자들은 참혹한 살육을 자행한 테러범의
만행을 세상에 폭로하고 고발하는 방법으로
증오의 입장에 섰을 거라는 생각이다.물론 이
경우에서 두 가지 입장은 모두 절박한 평화에
대한 요구라는 같은 지향점을 향하고 있다.
시리아의 사진 기자 하바크는 시리아 내전으로
피투성이가 된 난민을 끌어안는 방법으로 벼랑
에 선 시리아의 위기 상황을 세상에 알렸다.그를
촬영한 다른 사진 기자들도 전쟁의 비극을 세상
에 고발함으로써 시리아에 시급한 평화와 종전
의 필요성을 모두에게 주지시켰다.양쪽의 입장
과 그 표현의 방법은 다르지만 실은 같은 멧시지
를 세상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총탄에 포탄이
오가지는 않지만 하루 하루가 치열한 경쟁이다.
이 경쟁 때문에 숱한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
기도 한다.전쟁만큼이나 처절하다.대외 정세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조만간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대한 민국의 지금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이렇듯 끝을 알 수 없는 위기가 이어지고
있는 요즘 우리도 어떻게든 우리의 입장을 한번
쯤 정리할 필요가 있다.따뜻한 마음으로 어려움
에 처한 이웃에 관심을 갖고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찾는 편에 서거나 이런 어려움의
원인을 제공한 사회적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용기를 가질 때라고 생각한다.이도 저도 아닌
입장으로 문제의식 없이 살아간다면 우리에게
현실은 내내 감당키 어려운 벽이 될 것이며 위기
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찾는 것도 쉽지 않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입장이 있는 사람은 위기
에 강하다.우리 모두가 삶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갖게 되고 이 봄의 끝이 모두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한다.
-글/김감독 DP-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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