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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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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 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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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만에 새로 보이는 램브란트 그림.
책 추천받고 리서치하다가 알게된 사실들.
각각 다른 아버지의 두손,
강인한 왼손은 아버지의 공의, 정의.
부드러운 오른손은 어머니의 사랑, 온유.
둘째아들의 등뒤에 집중된 빛,
하나님의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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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탕자의 귀향 by 헨리 나우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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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 헨리 나우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그림은 그 사람의 삶을 바꾸었다. 나우웬은 평생 <탕자의 귀향>과 함께 살았고 <탕자의 귀향>을 썼다. 나우웬이 하버드의 교수직을 버리고 죽는 날까지 ‘라르쉬 공동체’에 들어가서 지적장애인들과 함께 살기로 결단하게 된 배경에 이 그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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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은 렘브란트가 나이 먹어 그린 대작으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아버지의 유산을 들고 자유를 찾아 떠난 작은 아들의 생활은 방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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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나라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허비해 버리고 급기야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다. 돼지 먹이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굶주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자기가 떠나온 아버지 집에서 지내던 풍성한 시절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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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집에서는 품군들도 풍족하게 먹지 않았던가. 이렇게 죽느니 아버지 집에서 품군이 되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안고 입맞추며 잔치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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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도 없이 그림을 그린 렘브란트는 위대하다. 마찬가지로 한 점의 그림을 통해 삶과 신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끌어낸 나우웬도 위대하다.
나도 화가로서 렘브란트가 되든지 감상자로서 나우웬이 되고 싶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그림을 그리든지, 한 점의 그림 앞에서 인생을 바꾸는 감상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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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1.8미터, 세로 2.4미터의 큰 화폭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노인이 거렁뱅이같은 사내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거의 눈이 먼 아버지는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말없이 안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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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남루한 옷차림에 겉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같은 모습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깎여져 있고, 다 닳은 샌들이 벗겨져 드러난 발바닥은 부르트고 굳은 살이 박혀 있다.
온갖 풍상을 겪다 돌아온 작은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손에 한없이 따사로운 빛이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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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에는 껴안고 있는 두사람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인물이 서있다. 이 집의 맏아들이다. 그리고 중간에 앉아서 가슴에 손을 얹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포옹을 지켜보고 있는 인물과 하녀인듯한 여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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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이 작품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숨이 막혀 온 종일 이 그림을 떠날 수 없었다.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해석했다. 나우웬이 대학교수의 일을 접고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것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두 팔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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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구경꾼에서 주인공이 되는 일이었고, 회개를 가르치는 자리가 아닌 회개하는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었으며, 소중한 존재로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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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품, 그곳은 “그토록 들어가기 원하면서도 두려워서 차마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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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간절히 열망하고, 소원하고, 갈구하던 것들을 모두 받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악착같이 붙들고 싶은 모든 것들을 놓아버려야 하는 자리였습니다.”(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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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
이 그림 앞에서 렘브란트의 고통에 찬 삶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들과 두 딸의 죽음을 봐야 했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내 사스키아까지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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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들 티투스의 유모와 맺은 관계는 그를 더욱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뒤 이어 만난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죽었다.
그러는 동안 화가로서의 명성도 수직으로 추락했고 재정적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젊은 날의 찬란한 성취와 명성의 뒤안길에서 고통스럽고 좌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것은 돌아온 탕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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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탕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즉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가지고 ‘먼 지방’ 낯선 나라에 가서 자신을 비우고 인간이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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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 다다른 예수는 ‘의로운 탕자’였다. 그는 상한 몸으로 모든 인류를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이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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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우리 모두가 탕자이며 돌아갈 집이 있고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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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과 칭찬을 받기위해 삶을 허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는 그림 속 아들의 모습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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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인간 존재의 근원에서 멀어진” 탕자이다. 세상의 헛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늘 아버지가 주신 것들로 허랑방탕하는 ‘영적인 가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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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탕자가 비루한 순간에도 끝내 팔아치우지 않았던 ‘단검’은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임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우리도 허리춤에 달린 ‘단도’를 움켜쥐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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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돼지처럼 대접해주길 바라는 자신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돼지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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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큰아들은 망나니 같은 동생을 위해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가 못내 못마땅했다. 그는 늘 아버지 집에서 가사를 돌보아 왔으나 아버지와의 마음의 간격은 크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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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의 귀향을 보고도 분노와 시기와 원망으로 가득했던 그 역시 ‘탈선한’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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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의 탈선은 동생의 경우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고 본질적이다. 큰아들은 집에 있으면서 집을 나간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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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귀향하기 위해서는 더 멀고 어려운 길을 가야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지팡이를 잡고 있는 그의 오른손에 어둠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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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용서와 사랑이 없는 성도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미 믿는다는 사람에게 믿음의 길이 더 멀리 있다는 무서운 진실을 큰아들을 통해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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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집을 나가는 아들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말리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아들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무작정 기다리며 애태우는 아버지, 눈물로 나날을 견디며 고통에 찬 삶을 사신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사죄할 틈도 주지 않고 용서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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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한 나머지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이 아버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탕자들을 아무 말없이 껴안는 예수 그리스도와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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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아버지는 차라리 어머니의 성정을 지녔다. 자세히 보면 아들의 어깨에 얹은 아버지의 오른손은 여성의 손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흡사 자궁 속 태아의 모습이다. <탕자의 귀향>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기하는, 즉 ‘존재의 근원’으로 회기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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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에서 대다수 감상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무릎 꿇은 아들에게 투사한다. 또한 자신이 큰아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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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림은 감상자를 아버지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 나우웬은 “아버지는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고, 내 여정의 종착점이며, 마지막 안식처” (219쪽)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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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림 속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향해 우리의 두 손을 펼쳐 용서와 사랑과 치유의 초청을 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되기까지 우리의 영적 귀향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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