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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월의 시대 (책 소개)
세대론과 색깔론에 가려진 한국 사회의 성장기
‘친일/좌빨’과 ‘보수/진보’, 이 두 대립 쌍은 그동안 분야를 막론하고 한국 사회를 관통해왔던 분석 틀이었다. 특정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두 대립 쌍은 우리 사회를 제대로 비추는 거울이라기보다는 내 편 가르기에 적합한 도구로서 오늘날에도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분열의 난립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객관적으로 분석해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추월의 시대』는 새로운소통연구소 소속 저자들이 한국의 현실에 대해 작심하고 쓴 책이다. 저자들은 그동안 1950년대 산업화 세대와 소위 ‘386’이라 불리는 민주화 세대의 대립으로 세계 속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한강의 기적’과 ‘민주주의 체제의 확립’ 과정을 거치면서 이미 우리나라는 선진국 ‘추격’을 끝내고 ‘추월’하는 단계에 와 있음에도 여전히 뒤쳐졌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우리 의식 속에 내재하는 ‘강요된 열등감’은 우리 스스로가 위축되게 만들었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의 발전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우리 사회가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과 그 방안,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까지 숙고해볼 수 있다.
책속에서
P.18
한국 사회는 이제 충분히 자긍심을 가질 만한 성취를 거두었다. 먼저 경제력 측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은 전근대 시기 국토의 절반만으로 2018년 기준 GDP(국내총생산) 1조 7천억 달러를 상회하며 세계 10위에 올랐다. 그 위 국가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제국주의 시대 열강의 한 축이었다. 1980년대에 동유럽 국가들을 넘어섰던 한국은 2010년대엔 남유럽 국가들을 추월하고 있다. 남유럽에서 마지막으로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로 남아 있는 것이 이탈리아 정도다. 한국을 식민 통치했던 일본이 5조 달러로 여전히 3배 규모이지만 인구 격차 역시 2배 반 정도다. 민주주의의 진전 역시 확연하다. GDP처럼 순위로 논할 것은 아니지만 특히 2016년 대통령 탄핵 촛불시위 이후에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높게 평가받고 있다. 최근 주요 서구 선진국에서도 제2차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질서가 흔들리는 것을 감안하면 ‘젊은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의 사정이 더 나아 보일 정도다.
―〈프롤로그〉
P.68
중도파란 말을 정치 현장에 대입할 때는 ‘스윙보터’라고 쓰기도 한다. 그들이 특정한 정당의 지지층이 아니라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들이 유동하는 현상이 아니라 유동하면서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했을 때 ‘캐스팅보트’라고 쓰기도 한다. 이 말 역시 확실한 지지층 사이에서 당락을 결정하는 유동층을 의미한다. 그렇게 선택지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숫자가 많지 않아도 종종 당선자를 바꾸는 경우가 있었기에 ‘캐스팅보트’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선거에서는 오랫동안 충청 지역이 그러한 ‘캐스팅보트’의 위치를 점해왔다. 그러나 2012년 대선에서 단일화 협상을 진행 중이던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사이에서 호남 여론이 고심한 것처럼 상황에 따라 기존에는 텃밭처럼 보이던 영역도 종종 ‘캐스팅보트’의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지역주의가 퇴조하면서 2030세대 청년층이 캐스팅보트로 여겨지게 됐다. 보통 60세 이상이 산업화 세대로 여겨진다면, 4050세대는 민주화 세대로 여겨지기에 더욱 그러하다. 중도파, 스윙보터, 그리고 캐스팅보트 등 뭐라고 부르든 그 집단의 무게추가 청년세대로 이동하는 현상은 물론 우리의 논의에서도 중요한 함의가 있다.
―〈2장 중도파의 나라〉
P.148~149
저출산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더라도 벌어진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라가 망하니까 당장 어떻게든 아이를 낳으라고 젊은이들을 향해 떼를 쓰는 듯한 태도는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가족계획을 너무 오래 지속했다는 사실과, 젊은이들의 합리적 선택이 누적될 동안 사회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다. …… 저출산이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발전 궤도에서 파생된 사태라면 ‘해결하지 못하면 망한다’고 호들갑만 떨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미칠 충격파를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것이다. 중기적으로 인구 감소 추이를 감당하면서 한국 사회가 미래 세대를 위하는 사회, 개개인의 생명과 자유와 노동권을 중시하는 사회, 아이를 낳으려는 청년세대의 자연스러운 욕망의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사회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4장 뉴노멀〉
P.236
이제 한국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 문제’는 더 이상 화두조차 아닌 수준이 됐다. 비정규직은 이제 고용불안 직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이란 말은 이미 ‘저임금 저숙련 일자리’를 대체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저숙련 노동자들은 로봇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자기 값어치를 로봇보다 싸게 팔아야 유지된다. 한편 고숙련 노동자들은 자신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한 굳이 한 직장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어찌 보면 상층도 하층도 유연해졌지만, 그 양상은 전혀 다른 셈이다. 정규직을 지켜내야 한다는 기존의 진보적 대안도, 정규직 기득권이 문제이니 정규직을 때려 부숴야 한다는 대안도, 일종의 허수아비를 치고 있는 셈이다.
―〈7장 ‘선망국’의 역설〉
P.312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말할 때 통상 발전국가 이론이나 종속이론, 근대화 이론 등 정치경제 이론들은 ‘후진국’이 ‘개발도상국’의 단계를 거쳐 ‘중진국’에 진입하는 것까지만 설명한다. 하지만 한국은 경제학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중진국 함정’을 2010년대에 뒤도 안 돌아보고 지나치고 선진국의 마지노선인 1인당 GDP 3만 달러
P.349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부터 전근대에 쌓은 자신의 역량으로 근대에 적응했다. 그것은 일본이 제국주의 시대를 전국시대로 파악한 것과 다른 방식이었다. ‘중화 사대 2천 년의 구력’으로 보편 속에서 고유를 추구했으며, 그렇기에 중국과 일본보다 기독교를 훨씬 더 적극 수용하면서도 유학의 문화를 어느 정도 간직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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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HESE BLESSINGS
All
these
blessings will
come upon
you
and
accompany
you
if
you obey
the LORD
your
God:
You
will be
blessed
in the city
and
blessed
in the country.
The fruit of
your womb
will be
blessed,
and
the crops of
your land
and
the young of
your
livestock
the calves
of your
herds
and
the lambs of
your
flocks.
Deuteronomy
28: 2-4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신명기 28: 2-4
Holy BIBL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성경/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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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rdians
Awsome m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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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 Jovi –
Livin’ On A Pr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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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ing on a prayer
Once upon a time
not so long ago Tommy used to
work on the docks,
union’s been
on strike
He’s down
on his luck,
it’s tough, so tough
Gina works the diner all day
working for her man
She brings home
her pay, for love,
for love
She says,
we’ve got to hold on to
what we’ve got
It doesn’t make a difference
if we make it or not
We’ve got each other
and that’s a lot
for love
We’ll give it a shot
Woah, we’re half way there
Woah, livin’ on
a prayer
Take my hand,
we’ll make it I swear
Woah, livin’ on
a prayer
Tommy’s got
his six-string in hock
Now he’s holding in what he
used to make it talk
So tough, it’s
tough
Gina dreams of
running away When
she cries in the
night,
Tommy whispers
Baby, it’s okay, someday
We’ve got to hold on to
what we’ve got
It doesn’t make a difference
if we make it or not
We’ve got each other
and that’s a lot
for love
We’ll give it a shot
Woah, we’re half way there
Woah, livin’ on
a prayer
Take my hand,
we’ll make it I swear
Woah, livin’ on a prayer
Livin’ on a
prayer
Oh, we’ve got to hold on,
ready or not You live for the fight
when it’s all that you’ve got
Woah,
we’re half way there
Woah, livin’ on
a prayer
Take my hand,
we’ll make it I swear
Woah, livin’ on a prayer
Woah, we’re half way there
Woah, livin’ on a prayer
Sung by Bon Jovi
Songwriters: Desmond Child /
Jon Bon Jovi / Richard S Sambora
Livin’ on a Prayer lyrics © Sony/ATV Music
Publishing LLC, Universal Music
Publishing Gro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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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priest-Andrew Kim Taegon-
사제, 순교자
순교자 김대건(金大建)
김대건(金大建, 1821년 8월 21일 ~ 1846년 9월 16일)은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순교자,
여행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출생
1821년 8월 21일
조선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
선종
1846년 9월 16일 (25세)
조선 한성부 새남터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시복
1925년 교황 비오 11세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매장지
한국인 성직자
어린 시절 이름은 김재복(金再福)이었으며, 세례명으로 쓰일 때는 대건 안드레아로 한다.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 (기념일)은 7월 5일이다. 그의 세례명 안드레아는 아버지 김제준의 동생이자 순교자인, 김대건의 작은 아버지 김한현(김종한이라고도 함)의 세례명을 이어받았다.
출생과 유년 시절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면천군 범서면 솔뫼마을(송산리, 현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김진후(비오) 이후
집안 대대로 천주교를 믿었다.
증조부 김진후는 본래 하급관리였다가 천주교 신자인 며느리의
모범적인 행실을 보고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하여 유배되었다가 1805년 해미읍성으로 압송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배교한 잘못을 뉘우친 김진후는 해미읍성에서는 형리들을 감화시켰다고 전해질 정도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형은 집행되지 않았으며, 충청도 해미읍성에서 10년 동안
옥살이 끝에 1814년에 옥사하였다.
김대건의 작은 할아버지이자 김진후의 셋째 아들인 김한현도
1816년 대구감영에서 배교를 하지 않고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감옥에서 형님에게 보낼 글을 쓸 기회를 얻자 “사람이 천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것이
영광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전해진다. 동생의 뒤를 이어 김제준(이냐시오)도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미리내 마을
이렇듯 종교의 자유를 탄압하는 조선정부의 극심한 박해를 피해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김대건은 7살 때까지 고향인 충청도 면천에서 살다가 가족들과 함께 경기도 용인의 산골인 골배마실로 피신하였다. 당시 용인 골배마실(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810)에는 박해를 피해 온 천주교회 신자들이 옹기 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며 복음을 전하는 천주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골배마실을 성지로 삼고 있다.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인)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김대건은 1836년 청소년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기 위해
은이성지를 방문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피에르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한양에서 라틴어 등의 기초적인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계몽사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김대건》에 의하면, 모방 신부는
김대건의 집안 내력을 듣고는, 김대건을 천주교 신부로 키울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다. 모방 신부 뿐만 아니라 정하상도 천주교 사제가 될 것을 권했다는 주장도 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실린 김재준의 공초(진술서)에 따르면, 평신도신학자인 정하상(바오로)는 김재준에게 “재복이(김대건의 아명,어린시절 이름)를 신학교에 보내시면, 훌륭한 성직자가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출신
김대건의 신분에 대해 평민이라는 주장이 있다. 김수태(안드레아)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2012년 ‘김대건 가문의 신분에 대한 재검토’라는 주제 논문에서 김대건의 신분은 평민이라고 주장했다. 제3대 천주교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6년 11월 3일자 서한에서 “김 안드레아는 조선의 남쪽에서 다스리던 한 옛 왕가(가야)의 후예라고 한다.… 현 왕조는 400년간 존속돼 오는데 안드레아의 가족 등 여럿은 왕족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 제5대 천주교 조선대목구장 다블뤼 주교도 「순교자 비망기」에서 ‘서민(평민) 집안’이라고 명시한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신학생 시절
한양에서 라틴어와 성직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배우는 기초 신학공부를 마친 후에 김대건은 평신도 신학자인 정하상(바오로), 정하상과 함께 조선교회에서 활동한 이광렬(요한), 조선에서 중국 청나라로 귀국하는 유방제(파치피코)신부의 도움으로 1836년 12월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유학 중에 병으로 1837년 11월 26일에 선종) 등과 함께 조선을 떠났으며, 만주와 요동을 거쳐서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피에르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나 중국인 신학교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
마카오 신학교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동양경리부의 불란서 가톨릭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온 신학생들에게 직접 신학, 철학, 지리, 역사,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라틴어,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다. 조선 신학생들의 스승이었던 르그레즈와 신부는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것,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고 대견해했다. 마카오 신학교에서의 신학생들의 공부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은 학문을 성실히 해야 함을 말하는 교회사 사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어려움
영국의 아편수출에 따른 민중항쟁, 김대건 신학생의 약한 체질[8], 서양과 동양의 전통이 다른 문화충격[9],최방제 신학생의 병사(위열병,1837년[10]11월 26일에서 27일)[11], 조차지인 마카오를 통치하던 포르투갈 정부의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에 대한 불이익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천주교 세종로성당에서 연재하는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정치가 불안해지면 피신하라는 파리 외방전교회 지침에 따라1839년 4월 필리핀 마닐라로 피신했으며, 1839년 5월 이동한 필리핀 롤롬보이의 성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원에서 공부할 때에 안정된 환경과 도미니코 수도회 사제들과 수사들의 친절덕분에 몸과 마음의 건강이 좋아졌다.
작문
계몽사에서 만든 ‘어린이그림전기 전집’《김대건》 위인전(구중서 지음/이우범 그림)에 따르면, 김대건은 신학생일 때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상당히 성숙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라틴어로 써서 남긴다.
“ 네로 황제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받았습니다. 집에서 사자를 키우던 어느 그리스도인도 잡혀갔고, 경기장에서 사자와 마주쳤습니다. 사람을 보고 달려들던 사자는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사자는 그리스도인이 키우던 사자였습니다. 자신을 키우던 주인을 보고 조용해진 것입니다. 사자도 제 주인을 알건만, 왜 사람들은 천주님을 못 알아보는 것일까요? ”
르네상스맨
가톨릭 잡지 가톨릭 다이제스트에 의하면 김대건은 마카오 신학교 시절 그를 가르친 교수들이 만약 신학생이 되지 않았다면 화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학문과 미술 모두 뛰어난 박식가이었던 것이다. 신학생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가 공부하던 시절은 서구시장에서 성장한 자본이 세력을 넒히도록 기독교, 군대, 상업이라는 삼각형으로써 식민지를 만들려는 서양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로써 저항하는 동방 민중들간의 대립과 투쟁이 있던 시대였다. 그래서 마카오에서의 민중운동을 피해, 필리핀 롤롬보이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물론 필리핀에서 가톨릭 신학을 공부한 이유는 에스빠냐의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가톨릭이 뿌리내린 나라이기 때문이다. 김대건의 학문을 신봉승 작가는 《조선왕조500년:대왕 정조-김대건》( 금성출판사)에서 김대건 부제가 유창한 불어로 밀사인 김프란치스코 교우가 전하는 조선 가톨릭교회 소식을 동행한 메스트르 신부에게 전하는 장면으로 그려낸다.
프랑스 함대 통역
1842년 2월 프랑스의 프리깃함인 에리곤 호 함장인 장 밥티스트 세실이 조선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 마카오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극동 선교부 소속인 리브와 신부에게 통역 한 사람을 비밀리에 요청하였다.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김수태 교수는 프랑스가 조선과 단독으로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경제적인 이익을 꾀하려고 세실 함장이 조선을 방문하려고 한 것으로 보았다. 파리 외방전교회 마카오 대표부 리브와 신부는 세실이 이끄는 프랑스 함선이 조선을 방문한다면, 선교사들이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선교활동을 하려는 계획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해로입국은 2대 천주교 조선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들은 해로를 개척하면, 천주교가 국가폭력으로 탄압받는 조선에서 선교사들이 목회하다가 순교하더라도 꾸준히 선교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학생이 라틴어로 대답하면, 선교사가 프랑스어로 옮길 수 있도록 김대건 신학생과 메스트르 신부가 에리곤 호에 올랐다. 프랑스 함선을 타고 조선에 돌아가는 여행길에 오른 김대건은 난징조약 체결현장 참관(1842년 8월 29일)등의 경험으로써 견문이 넒어지는 경험을 했다.(페레올 주교) 김대건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글을 읽어보면 난징조약 체결현장을 자세히 썼다. 하지만 1842년 9월 세실 함장이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의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갈 항해를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더이상의 여행을 하지 못했다. 1842년 2월 16일 이후,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받아 조선에 돌아가려고 했던 김대건 신부의 경로는 필리핀 마닐라(小西洋)→중국 주산이다.(파리외방전교회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글)
조선입국로 개척
서종태(전주대학교 역사문화콘텐츠학과)교수는 〈김대건 신부와 그의 기록〉(《기록인》 2014년 가을호,국가기록원 소식지)에서 김대건 신부가 길을 만드는 개척자였다고 기록했다.
“ 1844년 조선 입국을 위해 애쓰던 페레올(Ferréol, 高) 주교는 용기와 열정이 남다른 김대건에게 훈춘(琿春)에서 두만강을 건너 경원으로 입국하는 동북방 입국로의 이용 가능성을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김대건은 1844년 2월에 출발하여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4월에 돌아왔다. ”
사목과 순교
절두산 천주교 성지에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동상
성직자가 되다 편집
가톨릭 부제서품 편집
김대건은 1844년 12월 가톨릭 부제서품을 받았다.
상해로 가다
부제 때 조선에 잠시 들어온 김대건 부제는 당시 돈 146원 선박을 구입하여 ‘라파엘호’라 명명하고 1845년 4월 30일 천주교 신자 12명과 함께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하이로 갔다. 고틀랑 신부가 쓴 편지에 따르면, 나침반을 보고 항해한 작은배 라파엘 호는 서해에서 배가 가라앉을 뻔 했지만, 김대건 부제는 성직자로서 평신도들에게 성모 마리아의 상본을 보여주며 위로하고 격려했다.중국 선장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에 온 김대건은 영국 영사의 환대를 받았다.
예수회 고틀랑 신부의 환대 편집
연락을 받고 온 예수회(예수회에서 천주교 상하이 교구를 책임졌음)고틀랑 신부는 김대건 부제의 부탁으로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밤이 늦도록 정성껏 천주교 신자들의 고해를 들었고, 천주교 신자들도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서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는 성사인 고해성사에 참여하였다. 김대건 부제는 한국말을 모르는 고틀랑 신부를 배려하여 통역을 했는데, 고틀랑 신부는 “신학을 마카오에서 공부했고, 조선에서 온 천주교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김대건 부제의 속깊음을 칭찬했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쟈샹(金家港,금가항)성당(2001년 상하이 시에서 지방법원 부속건물을 짓기 위해 철거,한국 천주교회에서 은이성지에 진쟈상 성당을 복원했음. 가톨릭 신문에 의하면, 철거된 진쟈상 성당도 본래 성당이 있던 곳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다시 건축하였고, 김대건 신부를 기억하기 위해 라파엘 호를 상징하는 모습으로 경당을 지었음.)에서 세번째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가톨릭 사제 서품을 받았다. 당시 같이 따라간 조선의 천주교 신자 12분, 선교사, 중국 천주교 신부 1분등이 서품을 축하했다. 특히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이 교회를 사랑하셔셔 조선 처음의 천주교 사제가 서품받았다”라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일주일 후인 8월 24일 상하이 진쟈상 성당에서 30킬로미터가 떨어진 상하이 횡당성당(상하이 예수회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천주교 미사를 드렸다. 상하이 예수회 고틀랑 신부가 예수회 장상에게 보낸 1845년 7월 8일자 서한(9월 12일 추신을 적어 발송)에는 “… 그(김대건 신부)는 그의 첫 미사를 8월 24일 주일, 다블뤼 신부의 복사를 받으며 완담(즉 횡당) 신학교에서 드렸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가톨릭신문, 2015년 8월 23일, 박지순 기자)1845년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해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Daveluy) 신부를 모시고 함께 갔던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하이 항을 떠났다. 출항한 지 3일 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현재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에 표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2∼3일 정도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포구를 떠난 김대건 신부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의 나바위에 무사히 도착했다. 즉, 김대건은 1845년 10월 조선에 도착하였다. 12월까지 한양과 경기도 일대에서 기해박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선교사들의 순교로 교회가 무력화된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사목을 했으며, 남편과 사별한 후 박해를 피해 전전하던 어머니를 위로했다.
순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 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학 죄인(邪學罪人)김대건(金大建)을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건은 용인(龍仁)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 에 들어가서 양교(洋敎)를 배우고, 계묘년(1843년, 헌종 9년)에 현석문(玄錫文)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포청(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힐문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교활하여 양박(洋舶)의 강한 것을 믿고 협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마침내 그 교(敎)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은전(銀錢)을 흩어서 경외(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재화는 다 양한이 책중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양외의 제번의 말에 능통하므로, 천주교 신부로서 각국을 위하여 통사한다.’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주벌하였는데, 현석문은 신유년(1801년, 순조 원년)의 사도로 처형된 현계흠의 아들이다.
《헌종실록》 13권 12년(1846년) 음력 7월 25일 (무신) 1번째 기사, 《헌종실록》 헌종 대왕 행장
교세 확장 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외국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駐淸)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항로 개척이었다.
김대건은 1845년 10월에 조선에 들어온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항로를 알아보았다. 김대건은 경기도 연평도 앞바다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가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으로 가는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가 연평도 부근에서 순찰하던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중국어선을 관헌에서 징발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신분이 드러났다고 한다.
학식이 출중하여 옥중에서 몇몇 대신의 부탁으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고,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라틴어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말로 옮김과 함께 색칠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옮긴 지도는 헌종에게 바쳐졌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함을 아깝게 생각하여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하던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참수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갈 수 있는데, 김대건의 시체는 새남터 모래밭에 가매장되었다. 이민식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장례를 치렀다. 프랑스 해군의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해 조선으로 항해해 왔으나, 김대건이 순교하기 전까지 조선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당시 그의 유언은 “주교님,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였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어머니의 안위를 부탁한 것이었다. 또한 순교하기 전 하느님을 경외하고 죄를 짓지말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박해받는 신자들을 격려하였다.
“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았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와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 김대건, 참수형을 당하기 전에 한 말
장례
신봉승 사극작가에 따르면 김대건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현재 서울 노량진)에서 12명의 사형집행인에 의해 참수되었으며, 목이 군문에 걸려 효수되었다. 본래 양심수의 시체는 3일이내 가족이 찾아가도록 되어 있지만 김대건의 시체는 가매장되었다. 비밀리에 천주교 신자인 이민식이 김대건의 시신을 미리내 성지(경기도 안성)로 옮겼다. 1960년 7월 5일 김대건의 시신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교안의 성당에 이장되었다.
시성
1857년 교황 비오 9세가 김대건을 가경자로 선포하였으며,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복자로 선포하였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현재 한국 천주교회의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영성
김대건은 하느님을 가리켜 임자라고 불렀다. 하느님은 세상을 만든 임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그분을 배반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는 것이 김대건의 영성이었다.
열정
김대건은 몸이 약한 사람이었다. 마카오 신학교에 다니던 때에 선생들이 “김대건 신학생이 천주교 사제가 될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고, 세실 제독의 제안과 “건강이 나쁜 김대건 신학생이 프랑스 해군에서 생활하면 건강해질 것”이라고 기대한 페레올 주교의 생각으로 프랑스어통역을 할 때에는 독감에 걸렸다. 그런데도 성직자로 살아내었음은 김대건이 열정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몸이 약하다는 단점을 열정으로 이겨낸 성직자들로는 성 바울과 존 웨슬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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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TO THE RIGHT OR NOT TO THE LEFT
The LORD
will make you
the head,
not the tail.
If you
pay attention
to the commands
of the LORD
your God
that
I give you
this day
and
carefully
follow them,
you will
always be at
the top,
never
at the bottom.
Do not
turn aside
from any of
the commands
I give you
today,
to
the right
or to the left,
following
other gods
and serving
them.
Deuteronomy 28: 13-14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신명기 28: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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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성경/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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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 입춘
채 겨울도
떠나지 못한
들판에서
미리
푸른 것들이야
계절의 전령으로
치지
오메, 벌써
봄인갑다,
그리
오두방정으로
좌정치 못하고
들썩거리기
시작할라치면
이제
돌아오는 봄을
어찌 다 견디겠는가
낮고
볼품없는
밭두렁이나
언덕배기로부터
코딱지풀꽃이나
냉이꽃, 술꽃들이
서둘러 피어나면
듬성듬성
이름도 설운
오랑캐꽃이 또
피어나고
그러다
환장하도록
노오란 빛깔의 꽃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터라
미리
조심스럽다
매양 사는 꼴이
똑같아
하나도
더 나아지는
법이 없어
늘 초라하고
곤란하면서도
어찌 봄을 또 그리
겨워하는지
야윈 두 팔로는
햇빛을 가득
안으며
마른
가지마다
톡톡 움을 틔어볼까,
하는갑다
하찮은 바람에도
호들갑을 떤다
-김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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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no Mars –
Just The Way You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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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이길 장사는 없어/ 신작시
여름숲이
막 새 우주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모를때
세월이
쿵쾅쿵쾅 찾아와
보이지 않는
친구가
되었지
세월의 노래는
사랑노래 비애의 노래
핑계의 노래
원망의 노래
햇살과 계절과
꽃과 모든 꿈꾸는
것들에게 멀리서
띄어 주는
곡조
그때
안개꽃은
알았을까
세월은 이미
여름숲에
있었다는
걸
여름숲은
알았을까
세월은 벌써
노을에 당도
했다는
걸
안개꽃도
여름숲도 딸기밭도
빗방울도 풀꽃도
다 지나갔지
세월은 알겠지
그들이 세월을
지나간 것이
아니라
세월이
그들을 지나간
것임을
집이 있으나
집이 없는
세월이
숱한
고개를 지나
이제 막 노을고개를
넘었으니
지나간 세월은
기다려도 오지
못하고
또 어느
바람을 따라
어느 집 어느 고개를
지나가려나
세월을 붙잡을
장사 없으니
새봄이
오고 또 지나
가려니
-황망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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